영화89 영화 더 문, 잔업 끝에 마주한 우주와 40대 가장의 무게 맥주 맛이 텁텁해질 정도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여느 때처럼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녹초가 되어 돌아왔던 날이었습니다.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현관문을 열면 집안은 이미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불 꺼진 부엌 식탁 위에는 식어버린 찌개 냄비와 랩을 씌워둔 밥공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군요. 씻는 둥 마는 둥 샤워기 찬물만 대충 끼얹고 나와 냉장고 문부터 열었습니다. 시원한 탄산이라도 목구멍에 들이붓지 않으면 도무지 이 묵직한 피로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캔맥주 하나를 따서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고, 무심코 TV를 켰다가 화면에 떠 있던 영화 '더 문'을 틀었습니다. 내일 또 새벽같이 나가야 하니, 딱 반 캔 마실 동안만 멍하니 시간이나.. 2026. 9. 19. 라이프 오브 파이와 40대 가장, 호랑이를 숨겨야 집에 들어간다 새벽 1시 반, 충혈되어 붉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욕실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영화 속 파이의 벵골 호랑이가 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근에 찌들어 돌아와 식구들 깰까 봐 조심조심 씻고 나선 참이었습니다. 거울 속에 서 있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두 아이 아빠 얼굴이라기보다는 어디서 한바탕 물고 뜯고 싸우다 온 험악한 놈이 서 있었습니다. 화면 속 파이는 조각배 위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랑 둘이 갇혀 망망대해를 떠돕니다. 한눈팔면 그대로 물려 죽는 판이니 살겠다고 매 순간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버팁니다. 그 처절한 꼴을 보는데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나 역시 이 팍팍한 바깥세상에서 처자식 굶기지 않겠다고 온갖 독기랑 악을 품은 채 하루하루 버티고 있기.. 2026. 9. 18. 부탁 하나만 들어줘 본 뒤 떠오른 불필요한 호의와 사람 보는 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옆에 앉아 있던 집사람이 리모컨을 낚아채서 셋톱박스 홈화면으로 팍 넘겨버렸습니다. 화면이 꺼멓게 꺼지기도 전에 리모컨 플라스틱 모서리가 거실 테이블에 탁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요. 두 시간 내내 스크린을 채우던 화려한 원색의 옷감들과 번지르르한 뉴욕 상류층 말투들이 그 소리 한 방에 거실 공기에서 싹 날아갔습니다. 남들은 스릴러 반전이 기가 막히네, 여자 둘이 서로를 뜯어먹는 심리전이 매섭네 떠들어댑니다. 제 눈에는 그저 내일 가공해야 할 알루미늄 블록 수량과 도면 치수 생각만 머릿속을 꽉 채웠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씩 모니터에 머리 박고 0.01밀리미터 공차 맞추느라 눈알이 뻑뻑한 마당에, 저렇게 밑천도 없이 남의 호의 껍데기만 살살 긁어먹으며 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 2026. 9. 17. 영화 치어리딩 클럽, 퇴근길 4천 원짜리 깡통에 담긴 가장의 마음 집사람이 "웬 할머니들이 치어리딩 옷을 입고 있어? 주책이다, 딴 거 보자" 이랬는데, 결국 둘이서 캔맥주 하나 비울 때까지 끝까지 다 봤습니다. 평일 내내 도면 치수 맞추고 현장 기계 소음에 시달리다 금요일 밤에 겨우 한숨 돌리던 참이었습니다. 씻고 나와서 멍하니 TV를 켜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 걸린 게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거실 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아 마른 멸치 몇 마리에 고추장 찍어 먹으며 캔맥주를 나눠 마셨습니다. 겉보기엔 그냥 흔한 미국식 코미디 같았고, 은퇴자 마을에 모인 노인들이 춤추는 이야기라길래 솔직히 저도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채널을 돌리려던 집사람 손이 어느 순간 멈췄고, 저 역시 손에 쥔 맥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 2026. 9. 16. 공드리의 솔루션북, 엉터리 공책조차 없는 40대 가장의 새벽 “내 인생엔 저런 엉터리 솔루션북조차 없구나.” 새벽 1시, 불 꺼진 거실 소파 구석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리모컨을 쥔 손가락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툭 떨어질 뻔했지요. 낮 동안 모니터 화면 속에서 3D 모델링 와이어프레임과 씨름하느라 벌게진 눈이 TV 화면의 흰 자막 때문에 뻑뻑하게 아파왔습니다. 공드리의 솔루션북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 녀석은 제멋대로 편집실을 뛰쳐나가고, 자기만의 이상한 공책에다 말도 안 되는 지침들을 적어가며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더군요. 그 철딱서니 없는 고집과 헛발질을 지켜보는데 묘하게 속이 답답해졌습니다. 저 친구는 제 마음대로 판을 엎어버릴 예술가라는 핑계라도 있고, 저런 엉터리 수첩이라도 손에 쥐고 흔들어대지요. 그런데 정작 마흔 줄에 접어든 제 손에는 매달 날아.. 2026. 9. 15.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야간 잔업 끝난 거실에서 마주친 밀실의 공포 캔맥주가 차가운 게 아니라 꼭 기계 바닥에 고인 절삭유처럼 끈적하게 느껴지더군요. 시계를 보니 밤 9시 40분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종일 알루미늄 블록을 깎아내고 도면 수치를 맞추느라 눈알이 뻑뻑했습니다. 겉옷을 대충 벗어 걸어두고 신발장을 돌아보니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첫째와 유치원생 둘째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고, 아내도 아이들을 재우다 지쳐 안방 불을 꺼둔 상태였습니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냉장고 구석에서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하게 남은 발포주 한 캔을 꺼냈습니다. 식탁 의자를 끌면 끼익 소리가 날까 봐 그냥 거실 소파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지요. 리모컨을 쥐고 TV 볼륨을 숫자 1까지 바짝 낮춘 뒤 무료 영화 채널을 습관처럼 돌렸습니다. 화면에 낯익은 활자가 스.. 2026. 9. 14. 이전 1 ··· 3 4 5 6 7 8 9 ···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