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캔맥주가 차가운 게 아니라 꼭 기계 바닥에 고인 절삭유처럼 끈적하게 느껴지더군요. 시계를 보니 밤 9시 40분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종일 알루미늄 블록을 깎아내고 도면 수치를 맞추느라 눈알이 뻑뻑했습니다. 겉옷을 대충 벗어 걸어두고 신발장을 돌아보니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첫째와 유치원생 둘째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고, 아내도 아이들을 재우다 지쳐 안방 불을 꺼둔 상태였습니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냉장고 구석에서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하게 남은 발포주 한 캔을 꺼냈습니다. 식탁 의자를 끌면 끼익 소리가 날까 봐 그냥 거실 소파 귀퉁이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지요. 리모컨을 쥐고 TV 볼륨을 숫자 1까지 바짝 낮춘 뒤 무료 영화 채널을 습관처럼 돌렸습니다. 화면에 낯익은 활자가 스쳐 지나가는데, 바로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였습니다. 화면 속 어두컴컴한 복도가 켜지는 순간, 한동안 잊고 지냈던 20대 시절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여고괴담 6편, 밤 9시 넘어 귀가하다 걸리다
제가 이 시리즈를 극장에서 처음 본 게 군대 가기 전인 1998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단성사나 피카디리 같은 종로 극장에서 친구 놈들과 팝콘 통을 끌어안고 보다가 점프 컷에 놀라 바닥에 쏟아붓곤 했지요. 그 시절의 여고괴담은 그냥 심장 덜컹거리는 청춘의 오락거리였습니다. 불 꺼진 복도나 점프하듯 다가오는 귀신 얼굴에 소리를 지르고, 극장 문을 나서면 떡볶이나 사 먹으며 낄낄거리던 가벼운 공포였습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던 나이였으니까요. 그로부터 20년도 더 훌쩍 지나버린 지금, 마흔을 훌쩍 넘긴 가장이 되어 여섯 번째 이야기를 TV 화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교복 입은 여학생들과 폐쇄적인 학교 건물이 다시 등장하더군요.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모교의 교감으로 부임한 주인공 은희와 학교 안에서 온갖 억압을 받으며 겉도는 하영의 모습이 교차되었습니다. 스크린 속 화면은 예전 1편처럼 풋풋한 90년대의 질감이 아니라, 차갑고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솔직히 피곤에 절어 있는 상태라 채널을 돌릴까도 생각했습니다. 종일 모니터로 CAM 툴패스를 뽑아내고 0.01mm 단위 공차를 맞추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던 터였습니다. 귀신이나 피 칠갑이 나오는 영화를 굳이 이 야심한 밤에 찾아볼 여유는 없었지요. 소리를 1로 맞춰두었으니 대사도 제대로 들리지 않고 자막이나 인물들의 굳은 표정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채널을 멈추고 멍하니 보게 된 이유는, 화면 가득 번지는 어두운 학교의 공기가 제 일터의 밤 풍경과 기이할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다가도 밤만 되면 거대한 무덤처럼 가라앉는 그 적막함이 꼭 야간 잔업 때의 공장 같았습니다.
폐쇄 화장실 장면, 공장 잔업 밤이 겹쳤다
영화 중반부에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던 폐쇄 화장실이 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타일은 깨져 있고 천장 배관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 음습한 공간을 비추는 형광등이 불안하게 깜빡거리더군요. 그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초창기 2년 차 막내 시절 혼자 공장에 남아 철야 가공을 돌리던 어느 겨울밤이 문득 생각나더군요. 당시 공장장은 납기를 맞춰야 한다며 마지막 공정을 제게 던져두고 퇴근했습니다. 수백 평 남짓한 공장 바닥에 메탈할라이드 조명등 몇 개만 켜둔 채, 웅웅거리는 머시닝센터 모터 소리와 절삭유 펌프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지요. 소재 표면에 툴이 파고들 때 튀는 쇳가루와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미스트 연기 속에서, 캔맥주가 절삭유처럼 끈적하게 느껴지던 그 찝찝한 감각이 손끝에 다시 맴돌았습니다. 그때의 공장 바닥은 도망칠 구멍이 하나도 없는 거대한 수조 같았습니다. 새벽 1시가 넘어 마지막 황삭과 정삭을 끝내고, 방금 깎여 나온 제품을 바이스에서 내렸습니다. 손에 묻은 기름을 면장갑에 대충 문질러 닦고 노기스(캘리퍼스)와 마이크로미터를 들고 치수를 재기 시작했지요. 외경 치수가 도면 규격의 마지노선인 0.01mm 보정 공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더군요. 불량이라도 나면 비싼 특수강 소재비부터 가공 공수까지 전부 제 일당에서 까이거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때는 밤 11시에 혼자 컵라면 물을 부어놓고 젓가락을 들자마자 기계에서 삐- 소리와 함께 과부하 알람이 울려 허겁지겁 뛰쳐나가던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게이지 눈금이 가까스로 합격선에 딱 걸치던 그 순간, 등짝을 타고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러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었습니다. 내 손가락 하나 잘못 놀려 기계 스핀들이 처박히거나 치수가 마이너스로 터져버리는 현실이 진짜 공포였지요. 영화 속 학생들이 폐쇄된 공간에 갇혀 질식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 저는 십수 년 전 쇳가루 냄새 가득한 기계실 안에 혼자 갇혀 도면만 노려보던 제 젊은 날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40대만 뼛속으로 아는 이 영화의 진짜 공포
영화는 뒤로 갈수록 여고생 귀신의 원한보다 교직원들과 학교라는 조직이 숨겨온 추악한 진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학생을 보호해야 할 교사들이 성폭력과 비리를 덮기 위해 학생의 입을 틀어막고, 문제를 제기하는 아이를 문제아로 몰아세웁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멀쩡히 교단을 지키고, 어른들은 각자의 자리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시멘트 바르듯 사건을 덮어버리지요. 진짜 섬뜩한 건 피를 흘리는 혼령이 아니라, 자신들의 밥그릇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비겁한 침묵을 선택하는 어른들의 태도였습니다. 도망칠 곳 없는 밀실 속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구조적인 폭력, 그리고 그 안에서 모르는 척 눈을 감아버리는 기성세대의 모습은 영화 속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출근하는 공장 바닥에도, 억울해도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원청의 갑질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무실에도 고스란히 존재합니다. 도면대로 완벽하게 깎아 납품했는데도 원청 담당자가 결제일을 미루거나 말도 안 되는 단가 삭감을 통보해 올 때가 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도면을 집어던지고 들이받고 싶지만, 결국 거래명세표에 조용히 도장을 찍고 나오는 게 현장의 생리입니다. 20대 시절에는 저런 어른들을 보며 침을 뱉고 분개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비겁할 수 있느냐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요. 하지만 40대가 되고 두 아이의 아비가 된 지금은, 그 비겁한 침묵의 무게를 뼛속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스스로를 더 서늘하게 만듭니다. 나 혼자 총대를 메고 바른말을 했다가 일감이 끊기거나 거래처가 날아가면, 당장 우리 집 식구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계산이 먼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침묵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어느덧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온 제 비겁한 얼굴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40대 가장만이 체감하는 이 영화의 숨겨진 공포입니다. 새벽 1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손에 쥔 빈 맥주 캔 하나 구기지 못하고 멍하니 검은 화면만 바라보았지요.
영화 속 끔찍한 비극을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돌려야 할 CAM 작업과 다가오는 25일에 빠져나갈 아파트 담보대출 이자, 큰아이 영어 학원비 고지서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매달 25일이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대출 이자와 학원비 명세서를 보며, 그래도 이번 달 기계 안 부러뜨리고 공정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내가 참 우습고 질기더군요. 비겁하고 남루할지언정 내일 아침 7시에는 또 작업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공장 문을 열어야 합니다. 공차 0.01mm를 지키기 위해 또다시 노기스를 쥐어야 하는 빡빡한 일상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묵묵히 버텨내는 것이, 끈적한 절삭유 냄새 속에서도 가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제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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