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사람이 "웬 할머니들이 치어리딩 옷을 입고 있어? 주책이다, 딴 거 보자" 이랬는데, 결국 둘이서 캔맥주 하나 비울 때까지 끝까지 다 봤습니다. 평일 내내 도면 치수 맞추고 현장 기계 소음에 시달리다 금요일 밤에 겨우 한숨 돌리던 참이었습니다. 씻고 나와서 멍하니 TV를 켜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 걸린 게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거실 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아 마른 멸치 몇 마리에 고추장 찍어 먹으며 캔맥주를 나눠 마셨습니다. 겉보기엔 그냥 흔한 미국식 코미디 같았고, 은퇴자 마을에 모인 노인들이 춤추는 이야기라길래 솔직히 저도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채널을 돌리려던 집사람 손이 어느 순간 멈췄고, 저 역시 손에 쥔 맥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치어리딩 클럽, 킬링타임용으로 틀었다가
영화는 겉돌던 노년의 주인공 마사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삶을 정리하러 들어간 실버타운에서 시작합니다. 조용히 혼자 죽음을 기다리려던 사람이 옆집 이웃 셰릴에게 이끌려 어릴 적 포기했던 치어리딩에 다시 발을 들이는 내용입니다. 뼈마디가 쑤시고 무릎에 물이 차는 할머니들이 주위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팀을 꾸리고 오디션을 준비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민망하고 부질없는 짓일지 몰라도, 그 사람들에게는 그게 살아있다는 마지막 증거였던 셈입니다. 남들 보기 좋은 폼 나는 동작은 하나도 안 나옵니다. 팔을 뻗으면 어깨가 결리고, 발을 구르면 허리가 삐끗해서 얼음찜질을 달고 삽니다. 가공 현장에서도 낡은 기계로 100분의 1밀리미터 공차를 억지로 맞추려 애쓰다 보면 쇳가루 날리고 기름 튀며 모양 빠지는 날이 허다합니다. 영화 속 그 투박한 몸짓들이 꼭 제 현장 일 같기도 하고, 우리네 사는 모습과도 참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처음엔 "주책이다" 하면서 딴청을 피우던 집사람이 어느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영화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거실 형광등 불빛 아래로 비친 집사람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습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잔주름이 눈에 밟혔는데, 주인공들이 삐걱거리는 몸으로 끝내 박자를 맞추며 춤을 출 때 집사람 눈가가 슬쩍 붉어져 있었습니다. 나이 들고 몸이 굳어가는 건 순식간인데, 하고 싶은 걸 묻어두고 살아온 시간은 너무 길었겠지요. 젊은 시절 꿈 하나쯤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 둘 키우며 살림 꾸리느라 제 손에 물 마를 날 없던 아내의 세월이 그 영화 속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 위에 겹쳐 보였던 것 같습니다.
차마 '왜 울어?' 못 하고 멸치 대가리만 긁어모았다
눈물이 고인 아내를 보면서도 차마 "왜 울어?"라는 말 한마디를 툭 던지지 못했습니다. 40대 가장이라는 자리가 늘 그렇듯, 속마음과 달리 입 밖으로 나가는 말은 투박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신 쟁반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마른 멸치 대가리와 고추장 자국만 휴지로 묵묵히 긁어모았습니다. 다 식어서 김 빠진 캔맥주를 싱크대로 치우면서 헛기침만 두어 번 내뱉었습니다. 아이들은 제 방에서 곯아떨어졌고, 거실에는 적막만 가득했습니다. 집사람은 텔레비전을 끄고 "먼저 잘게"라며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멸치 부스러기를 다 닦아내고 방으로 따라 들어가 불을 껐습니다. 이불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와 있는 집사람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잠든 아내의 거칠어진 손등을 가만히 손가락으로 쓸어보았습니다. 살결이 거칠고 손마디가 불거져 있는 것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교 챙기고, 빨래 개고, 장바구니 들며 세월을 버텨낸 손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쇳덩어리 만지며 거칠어진 제 손만 고달픈 줄 알았는데, 아내의 손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묵직한 부채감이 얹혀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도 한때는 예쁘게 꾸미고 꽃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텐데, 넉넉지 않은 형편에 남편 월급 쪼개 쓰고 애들 학원비 챙기느라 제 몸 하나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새벽 네 시가 넘어 창밖으로 첫차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들릴 때까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출근길, 포터 트럭 아저씨도 시뻘건 눈으로 하품
세 시간도 채 못 자고 알람 소리에 일어나 시뻘건 눈을 비비며 작업복을 걸쳐 입었습니다. 밤새 쑤시던 어깨를 주무르며 현관문을 나서는데,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을 때렸습니다. 찬 바람 한 방에 밤새 거실에서 피어올랐던 센티멘털한 감정은 싹 날아갔습니다. 머릿속에는 당장 오늘 가공을 끝내야 할 도면 치수와 납기일 생각만 꽉 차올랐습니다. 산업단지 진입로 신호 대기선에 차를 세우고 옆을 쳐다보았습니다. 옆 차선에 선 파란색 포터 트럭과 낡은 탑차 기사님도 저처럼 벌건 눈으로 하품을 쩍쩍 찢어지게 하고 있었습니다. 덜덜거리는 디젤 트럭 운전대를 잡고 피로를 털어내려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픽 나왔습니다. 다들 저러고 사는구나 싶었습니다. 집안에 처자식 눕혀 두고, 어떻게든 오늘 하루 밥벌이를 해내려고 새벽 어스름을 뚫고 길바닥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기계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공차 100분의 1밀리미터 때문에 머리통이 깨질 것 같아도, 묵묵히 버텨내야 하는 이유가 다들 등에 얹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밖으로 나가서 기름때 묻혀가며 땀을 흘려야, 집에 있는 식구들 밥이라도 굶기지 않고 아내 손에 로션 하나라도 쥐여줄 수 있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영화 속 치어리더 할머니들의 열정도 눈물겹지만, 새벽 아스팔트 위에 트럭 바퀴를 굴리는 우리네 일상도 그에 못지않게 치열한 싸움터였습니다. 핸들을 꽉 쥐고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습니다.
4천 원짜리 깡통, '손 거칠어 보이더라, 쳐발라'
퇴근길 차 안에서 이런저런 말을 수없이 연습해 보았습니다. "고생이 많지?", "이거 손에 좀 발라라" 같은 다정한 대사를 굴려봤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목구멍에 턱 걸렸습니다. 결국 제 입에서 튀어나온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한마디였습니다. "어, 밥은?" 가방에서 낮에 편의점에 들러 샀던 파란색 니베아 크림 깡통을 꺼냈습니다. 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채 샀다 놨다, 이걸 굳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십 번을 망설였던 4천 원짜리 물건이었습니다. 식탁 위에 툭 내려놓으면서 애써 무심한 척 덧붙였습니다. "손 거칠어 보이더라, 쳐발라." 집사람이 가스레인지 앞에서 찌개 국자를 젓다 말고 뒤를 돌아보더니, 식탁 위의 파란 깡통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등을 돌려 국자를 저으며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 뒷모습을 보는데, 괜스레 귓바퀴가 화끈거렸습니다. "찌개 맛있네." 저녁상에 마주 앉아 밥 한 공기를 비우며 던진 그 짧은 한마디였는데, 거실 안을 맴돌던 공기가 전날 밤보다 훨씬 덜 시리게 느껴졌습니다. 그 4천 원짜리가 내 한 달 치 월급봉투보다 훨씬 더 값지게 쓰인 것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참 먹먹했습니다.
내일 아침도 여느 때처럼 눈 비비며 공장 문을 열어야겠지만, 아내 손등에 하얗게 발라질 그 크림 냄새를 떠올리며 또 한 주간 쇳조각 깎아내는 소음을 버텨낼 생각입니다. 가장의 몫이란 게 대단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고 투박한 온기 하나 지키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공드리의 솔루션북, 엉터리 공책조차 없는 40대 가장의 새벽 (0) | 2026.09.15 |
|---|---|
|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야간 잔업 끝난 거실에서 마주친 밀실의 공포 (0) | 2026.09.14 |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마흔 넘은 기술자 눈엔 화폭 뒤 쪼들린 살림만 보였다 (1) | 2026.09.13 |
| 영화 트위스터스 결말 후기: 괴물 같은 폭풍 너머, 새벽에 지켜낸 아이 방 한 칸 (0) | 2026.09.12 |
| 스트레인저스: 챕터 1 줄거리 리뷰: 집이라는 안식처를 무너뜨린 맹목적 폭력의 공포 (1) | 2026.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