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1시 반, 충혈되어 붉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욕실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영화 속 파이의 벵골 호랑이가 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근에 찌들어 돌아와 식구들 깰까 봐 조심조심 씻고 나선 참이었습니다. 거울 속에 서 있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두 아이 아빠 얼굴이라기보다는 어디서 한바탕 물고 뜯고 싸우다 온 험악한 놈이 서 있었습니다. 화면 속 파이는 조각배 위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랑 둘이 갇혀 망망대해를 떠돕니다. 한눈팔면 그대로 물려 죽는 판이니 살겠다고 매 순간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버팁니다. 그 처절한 꼴을 보는데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나 역시 이 팍팍한 바깥세상에서 처자식 굶기지 않겠다고 온갖 독기랑 악을 품은 채 하루하루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며 곤두세운 그 모난 성깔을 현관문 도어록 누르는 순간 구석에 억지로 쑤셔 박아두고 들어오는 내 모습이 영화 속 풍경과 똑 닮아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다니지만, 집에 오면 순한 남편이자 아빠여야 합니다. 찬물로 얼굴을 거칠게 씻어내며, 오늘 하루 내가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게 대체 뭔지 멍하니 곱씹어 보았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 새벽 1시 반 거울 앞에서
영화 속 파이는 언제 덮칠지 모르는 맹수와 한배를 탄 채 바다를 건넙니다. 방심하면 바로 끝장나는 그 상황이 파이를 어떻게든 살아남게 만듭니다. 저 역시 스무 살 무렵 기름 묻혀가며 기계 바닥에 들어와 15년 동안 가공 밥을 먹으며 늘 그런 살얼음판을 디뎌왔습니다. 매일 아침 작업복 지퍼를 올릴 때마다 속으로 독한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바깥세상은 조금만 물러터지게 굴면 바로 밀려나는 판입니다. 원자재값은 계속 오르고 가공 치수는 0.005밀리미터 공차로 빡빡하게 조여오는데, 거래처 사람들은 납기 당기라고 매일같이 쪼아댑니다. 그 틈바구니에서 내 몫 챙기고 가족들 건사하려면 순하게 허허거리고 있어서는 답이 안 나옵니다. 언제든 맞받아칠 준비를 하고 매 순간 신경을 팽팽하게 당겨 쥐어야만 겨우 버팁니다. 문제는 일터에서 하루 종일 품고 있던 그 날 선 독기가 퇴근 도장 찍는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공장 문 닫고 차에 타도 핏발 선 눈과 곤두선 예민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밖에서 살아남으려고 몸에 익힌 그 억센 성질머리를, 현관문 열기 직전에 억지로 구석에 쑤셔 넣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안방으로 들어가는 일이 매일 밤 반복됩니다. 이걸 제대로 털어내지 못하면 결국 내가 지키려는 집 안까지 그 모난 성격이 삐져나오고 맙니다. 파이가 호랑이를 길들이지 못했다면 보트 위에서 진작에 죽었을 것입니다. 나 역시 내 안의 사나운 성질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면 가장 노릇도 제대로 못 한다는 걸, 새벽에 거울을 볼 때마다 씁쓸하게 느낍니다.
공장 현장,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살기
납기일이 코앞인데 거래처에서 넘겨준 도면 치수가 엉망으로 꼬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가공 원점도 제대로 안 잡힌 3D 모델링 데이터를 붙들고 모니터 보면서 CAM 가공 경로를 짜다 보면 골치가 지끈거립니다. 거기에 기계에서 경고음이 빽 울리며 고가 소재 블랭크가 파손이라도 나면, 목구멍까지 거친 욕지기와 살기가 치밀어 오릅니다. 처음 2년 동안 기름 범벅이 되어 바닥에서 쇠 칩 치우던 시절에는 몸만 고단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지금은 소수점 둘째 자리, 셋째 자리 치수 하나 틀어지면 수백, 수천만 원짜리 금형 부품이 그대로 고철이 되고, 세팅 실수 하나로 납품 일정 전체가 펑크 나는 책임을 혼자 짊어집니다. 거래처 담당자는 전화로 오늘 물건 안 나오면 라인 선다고 신경질을 냅니다. 그럴 때는 정말 눈앞이 노래질 정도로 화가 치솟습니다. 그럴 때마다 공장 비상계단으로 뛰어나가 찬바람을 맞으며 담배 한 대를 꺼내 뭅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면서, 턱밑까지 올라온 성질머리를 억지로 억누릅니다. 여기서 뚜껑 열려 판 엎어버리면 내 밥줄이 끊기고, 아파트 대출금이랑 애들 학원비가 바로 막힌다는 현실이 머릿속을 스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억지로 다잡고 다시 기계 컨트롤러 화면 앞으로 돌아갑니다. 밖에서는 지지 않으려고 핏대를 세우며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싹 잊은 척 평범한 아빠 행세를 하는 일상이 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갑니다.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가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40대 가장에게는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 울화를 꾹꾹 눌러 담고 다시 공구 마모 상태를 확인하며 기계를 돌립니다.
신발 꼬투리, 베란다 찬바람과 자괴감
그렇게 종일 억눌러둔 짜증이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기계 세 대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켜서 납기 맞추느라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날이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둘째 녀석이 대충 벗어던져 놓은 운동화 한 짝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발끝으로 툭 밀어두고 말았을 아주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버럭 언성을 높이고 말았습니다. "신발 하나 똑바로 못 두고 들어오냐"며 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쏘아붙였습니다. 숙제하던 아이는 겁을 먹고 그대로 굳어버렸고, 주방에 있던 아내도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습니다. 집 안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겁에 질린 아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황급히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활짝 열고 찬바람을 쐬었습니다. 밖에서 돈 벌어오겠다고 곤두세웠던 그 날 선 신경질로, 정작 내가 챙겨야 할 식구들 가슴을 후벼 팠다는 생각에 지독한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공장에서 온갖 일 겪으며 겨우 참아냈던 못된 성깔을, 제일 편안해야 할 내 집 거실에 그대로 쏟아내 버린 꼴이었습니다. 내가 일터에서 품고 버티는 독기는 가족들 비바람 막아주는 데 써야지, 집 안 식구들을 향해 휘둘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식구들 지키겠다고 세운 고집이 정작 집안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는 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찌푸린 얼굴이 참 못나 보였습니다.
5~6년째 주차장 의식, 유일한 소독약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나 혼자만의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퇴근해서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면, 바로 시동을 끄지 않고 헤드라이트 꺼질 때까지 5분에서 10분 정도 핸들을 잡고 가만히 버티고 앉아 있는 시간입니다. 벌써 5~6년째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퇴근길마다 거르지 않고 혼자 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에어컨 끈 차 안의 텁텁한 공기 속에서, 겨울에는 유리창에 하얗게 서리는 입김을 보면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라디오도 끄고 휴대폰도 보지 않습니다. 조용한 차 안에 혼자 있으면, 하루 종일 머리를 울려대던 고속 가공 스핀들의 쇳소리와 콤프레샤 소음이 귓가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는 게 느껴집니다. 하루 종일 모니터 보느라 침침했던 눈도 그제야 좀 맑아집니다. 그 10분이 내게는 바깥의 거친 성질을 털어내고 제정신으로 집에 들어가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온몸에 밴 쇠 냄새와 일터에서 묻혀온 날카로운 감정을 시트에 털어버리고, 평범한 집안 가장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가끔 왜 이렇게 늦게 올라왔냐고 아내가 물어보면, 트렁크에 짐 좀 정리하느라 늦었다고 능청스럽게 둘러대곤 합니다.
그 5분, 10분이 없었으면 집구석 진작에 풍비박산 났을 것입니다. 그 비밀 하나 평생 혼자 묻어두고 가는 게, 가장 노릇의 기본값이기도 합니다. 내일도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해서 0.01밀리미터 치수 맞추느라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차에서 그 성질머리를 털어내고 들어왔으니 그것으로 됐습니다. 피곤함이 몰려오는데 얼른 자리에 누워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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