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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기름밥 먹는 기술자가 본 어느 청소부의 하루

by 풍성함 2026. 9. 25.

퍼펙트 데이즈 영화 공식 포스터

주말 잔업을 마치고 들어와 캔맥주를 따놓고 영화를 켰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맥주 거품이 다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토요일 내내 가공 납기를 맞추느라 정신없이 치수를 재고 프로그램을 돌리다 온 참이었습니다. 씻고 나와서 딱 한 캔만 마시고 곯아떨어질 생각이었는데,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낡은 카세트테이프 소리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탄산이 다 빠져나간 맥주 캔 표면에 물방울만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는 안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고, 집 안에는 웅웅거리는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낮게 깔렸습니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쇳소리와 에어건 소리에 시달린 귀가 먹먹하던 차에, 화면 속 도쿄 공중화장실을 닦는 남자의 고요한 손놀림이 눈앞에 가득 찼습니다.

 

퍼펙트 데이즈, 공장 노동자가 본 날

일주일 내내 쇳가루 날리는 현장 바닥과 기름 냄새 밴 사무실을 오가며 일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난삭재 가공 일감이 들어와서 툴 마모가 워낙 심했던 탓에, 소수점 둘째 자리 공차 0.01mm를 맞추느라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습니다. 한 치수라도 삐끗하면 몇백만 원짜리 소재를 통째로 날려 먹는 상황이라 온종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금요일 야근에 이어 토요일 잔업까지 뛰고 집에 오면 보통은 쓰러져 자기 바쁩니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 히라야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정갈하게 세수를 하고, 작은 화분들에 물을 준 뒤 파란 작업복을 입고 문을 나섰습니다. 화장실 변기를 닦고 거울의 물기를 닦아내는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손에 익은 도구를 다루는 품새만 봐도 그 사람이 그 일에 들인 세월과 태도가 단번에 보였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지저분한 공중화장실 청소부일지 몰라도, 그는 자신이 맡은 구역을 완벽하게 다듬어놓고 있었습니다. 손 닿지 않는 변기 밑바닥 안쪽까지 작은 손거울을 비춰가며 묵은 때를 긁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자세를 고쳐 잡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기름밥을 먹던 이십 대 초반에 선반 베드를 걸레로 닦고 칩을 긁어내며 기계를 배우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화려한 대사나 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 묵묵히 빗자루질을 하는 그 반복적인 장면을 보는데, 머릿속에 엉켜 있던 찌꺼기들이 한 꺼풀 씻겨 내려간 것 같아 TV를 끄지 못했습니다. 기계 가공 코드만 잔상처럼 맴돌던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엔딩 후 30분, 까만 화면 속 내 얼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넷플릭스 로고마저 사라진 뒤에도 30분을 까만 화면 앞에 그대로 굳어 있었습니다. 멍하니 보고 있던 시선 끝에 화면이 꺼지자, TV 꺼진 패널 위로 푸석푸석한 40대 아저씨인 제 얼굴이 덩그러니 비쳤습니다. 눈 밑은 거뭇하게 내려앉았고, 턱수염은 깎지 않아 텁텁했으며, 피로에 찌든 가장의 낯선 낯짝이 거기 있었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식어서 밍밍해진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탄산은 이미 다 날아가서 쓰디쓴 보리차 맛에 가까웠지만 목구멍으로 그냥 털어 넣었습니다. 주방 싱크대 쪽에서 들려오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냉장고의 웅웅 소리, 그리고 거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서늘한 밤공기가 유난히 낯설고 고요했습니다. 그 침묵이 너무 오랜만이라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늘 납기 일정에 쫓기고, 현장 작업자들과 치수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집에 오면 아이들 숙제 챙기느라 단 일 분도 멍하니 가만히 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항상 다음 주에 깎아야 할 알루미늄 블록 수량과 외주 열처리 일정을 계산하느라 바빴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운전대를 잡고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아침 햇살을 맞이하던 히라야마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 남자는 저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저토록 복잡한 눈빛을 지었을까,

 

나는 언제 저런 얼굴을 해보았나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참 동안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까만 화면 속 제 얼굴만 노려보았습니다. '나는 언제 하늘을 올려다봤나' 문득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기억을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봐도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각하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작업복 바지를 꿰어 입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운전대를 잡고 공단으로 향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출근해서는 조도계와 버니어캘리퍼스만 노려보며 제품 치수가 도면 규격 안에 들어왔는지만 확인했습니다. 점심시간 50분 동안에는 오후 잔업을 버틸 생각으로 식판에 밥과 국을 퍼 담아 쑤셔 넣듯 입에 욱여넣기 바빴습니다. 밥을 씹으면서도 오후에 돌릴 머시닝센터 공구 세팅 시간을 어떻게 줄일지만 궁리했습니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과 매달 나가는 아파트 대출 원리금, 애들 영어 학원비 영수증을 확인하며 가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쉬는 날 없이 특근을 뛰어가며 처자식 굶기지 않고 남들 사는 만큼은 키워내려고 아등바등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제 삶의 진짜 순간들은 공장 바닥에 떨어지는 시커먼 쇳가루 속에 파묻혀 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히라야마는 점심때마다 신사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머리 위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로 담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빛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빛에는 쫓기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똑같이 몸을 쓰는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그는 하루 속에서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는 틈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10초·한 바퀴·심호흡, 생긴 버릇 셋

그 영화를 보고 난 뒤로부터 일상에 작은 버릇 세 가지가 생겼습니다. 요즘은 출근길에 공장 앞마당에 차를 대고 내리면, 차 문에 기댄 채 딱 10초 동안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날이 맑든 흐리든, 미세먼지가 자욱하든 상관없이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멍하니 위를 쳐다봅니다. 단 10초지만 공장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나를 온전히 세워두는 시간입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자판기 믹스커피 한 잔을 뽑아 듭니다. 기름 냄새 가득한 가공실 대신 공장 뒤편 마당 콘크리트 바닥 틈새를 보며 한 바퀴 천천히 걷습니다. 갈라진 시멘트 바닥 틈에서 용케 자라난 이름 모를 잡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커피를 홀짝입니다. 매일 치수와 싸우는 삭막한 기계실 밖에도 계절이 지나가고 생명이 자란다는 걸 그제야 눈으로 확인합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때도 바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현관 도어록을 누르기 전 복도에 멈춰 서서 길게 심호흡을 한 번 내뱉습니다. 공장에서 묻혀온 긴장과 피로를 복도에 털어내듯 숨을 고르고 들어서면, 거실로 우르르 달려오는 아이들의 땀 밴 머리통을 예전보다 한 번 더 꾹 쓰다듬어 주게 됩니다.

 

반복되는 일과는 여전히 고단하고 다음 달 청구서 날짜는 어김없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똑같은 쳇바퀴라도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감각을 손바닥에 쥐고 돌아가는 건 완전히 다른 기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일 아침에도 차 문을 닫고 공장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10초를 악착같이 챙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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