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드값 빠져나간 직후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헛헛한 마음을 품은 채로 소파에 앉아 영화 <몽키맨>을 틀었습니다. 오늘도 공장에서 꼬박 열두 시간을 채우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습니다. 소수점 두 자리 공차를 맞추느라 온종일 CAD 도면과 CAM 프로그램 모니터만 노려보았더니, 눈알이 뻑뻑하고 잔상이 가시지 않았지요. 작업복에 밴 절삭유 특유의 비릿한 기름 냄새를 씻어내고 거실로 나왔을 때, 집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습니다. 습관처럼 켠 스마트폰 화면에는 카드 결제와 공과금 자동이체 출금 알림이 줄줄이 찍혀 있더군요. 잔고에 찍힌 숫자를 멍하니 보며 마른세수를 몇 번이나 문질렀는지 모릅니다. 가슴속에 들어찬 허탈함을 달랠 길 없어, 냉장고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 들고 불 꺼진 TV 앞에 주저앉았습니다.
몽키맨, 특근 끝 밤에 혼자 틀었다
토요일 특근은 유독 살을 깎아먹는 기분이 듭니다. 이번에 가공한 부품은 질긴 특수강 소재라 조금만 방심해도 절삭 공구에 부하가 걸려 가공면에 거친 떨림 자국이 남아버렸지요. 정밀 공차 100분의 1밀리미터를 지켜내지 못하면 비싼 원자재가 그대로 폐기통으로 들어가는 탓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기계 앞을 지켜야 했습니다. 쇳가루 날리는 분진과 모터 소음 속에서 하루 종일 날을 세우고 돌아온 몸뚱이는 그저 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실 불을 켜면 방에서 곤히 자는 아이들이 깰까 염려되어 발뒤꿈치를 들고 발소리를 죽였습니다. 주방 냉장고 문을 살짝 열었을 때 새어 나온 차가운 푸른빛만이 어두운 식탁 모서리를 비추고 있었지요. 편의점에서 집어 온 캔커피 뚜껑을 딸 때 나는 '딱' 하는 작은 파열음마저 적막한 집 안에서는 유독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캔커피를 들이켜며 다시 한번 은행 앱을 켜보았습니다. 며칠 전 들어온 특근 수당과 월급은 온데간데없고, 스쳐 지나간 흔적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지요. 마흔을 넘기고 공장 현장 15년 차라는 직함을 달았지만, 통장 잔고 앞에서는 매달 한없이 작아지기 일쑤입니다. 원망이라기보다는 그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쓸쓸한 무력감이 거실 공기를 차갑게 식혔습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식히려고 리모컨을 눌러 OTT 목록을 넘기다 영화 <몽키맨>을 발견했습니다. 배우 데브 파텔이 직접 연출과 주연을 도맡았다는 인도 배경의 거친 액션 영화였지요. 낡은 원숭이 가면을 뒤집어쓴 채 상처투성이가 된 남자의 얼굴이 포스터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습니다. 번쩍거리는 슈트를 입은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들 사이에서, 땀과 먼지에 찌든 그 투박한 얼굴에 유독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아이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TV 음량을 한 자릿수인 8로 낮추었습니다. 거창한 철학이나 대단한 영상미를 기대하고 튼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밤늦게까지 쇳덩이를 깎다 돌아온 피로한 눈으로, 아무 생각 없이 저 거친 몸부림에 멍하니 시선을 맡기고 싶었을 따름이었습니다.
20분 만에 허리 세운 장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영화 시작하고 15분 정도만 지나면 소파에서 곯아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온종일 CAM 가공 경로 선들을 검증하느라 시신경이 바짝 타들어가 있었고, 어깨는 주물 덩어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거웠으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2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저는 저도 모르게 소파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말았습니다. 지하 불법 격투기장 링 위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광경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 키드는 원숭이 가면을 쓴 채,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덩치 큰 파이터들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습니다. 구경꾼들이 쏟아내는 조롱 속에서, 그는 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엉망이 되어 바닥을 구르면서도 링 밖으로 기어 나가지 않았지요. 그 악착같은 생존의 풍경은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드는 날카로운 긴장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캔커피를 입가로 가져가려다 그대로 멈추어 섰습니다. 머리를 짓누르던 무거운 수면욕과 피로감이 일순간에 싹 날아가 버렸지요. 세상이라는 거대한 덩치한테 두들겨 맞고 내동댕이쳐지면서도, 절대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 고집이 결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에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거실 장판을 타고 제 발끝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습니다. 스물다섯 살 무렵, 기름밥을 처음 먹기 시작했던 막내 시절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절삭 칩에 손등이 찢겨 나가고 피부에 절삭유 독이 올라 짓물러도, 선배 기술자들에게 모진 소리를 들으며 기계 영점을 잡던 시절 말입니다. 그때의 저 역시 기댈 곳 하나 없이, 오직 현장 바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오기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텨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쉽게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 하나쯤은 품고 버티기 마련입니다. 세상이 내 숨통을 조이고 바닥으로 패대기쳐도, 이 불씨만큼은 결코 짓밟히지 않겠다는 독기 같은 것 말이지요. 링 바닥의 흙먼지를 들이마시면서도 시퍼렇게 살아있던 주인공의 눈빛에서, 거친 생업을 묵묵히 짊어지고 가는 우리네 가장들의 질긴 생명력을 보았습니다.
300만 원 썰물, 띠링 띠링 주먹
가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는 현실은 매달 날아오는 금융 청구서와의 지루한 난타전입니다.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으로 145만 원이 빠져나갔고, 아파트 관리비 25만 원이 뒤를 이었습니다. 여기에 첫째와 둘째 아이의 영어, 수학 학원비 110만 원을 더하니, 숨만 쉬고 살아도 지출되는 고정비만 정확히 300만 원에 육박하더군요. 쇳가루를 마셔가며 잔업으로 메운 돈들이 통장에 머무는 시간은 썰물처럼 짧았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위로 쉼 없이 뜨던 '띠링, 띠링' 출금 알림은 단순한 문자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드도 올리지 못한 채 서 있는 제 턱 끝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히는 묵직한 주먹질이나 진배없었지요. 잔고가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매일 12시간씩 기계 소음을 견디고 있는가' 하는 메마른 자괴감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통장 잔고의 압박은 소리 없이 가장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런데 <몽키맨> 속에서 거칠게 터져 나오는 육탄전을 응시하고 있자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300만 원짜리 계산서들이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빈민가 뒷골목 식당 주방부터 권력자들의 빌딩까지, 온몸이 부서져라 달려드는 주인공의 액션은 그냥 길바닥 개싸움 그 자체였습니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접시와 나무 각목, 깨진 유리 조각까지 닥치는 대로 쥐어짜며 몸을 던지는 몸부림에 어설픈 멋 따위는 없었지요. 정밀 가공 현장에서도 회전하는 공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할 때 겁을 먹고 이송 속도를 급하게 줄여버리면 공구가 터져 나가며 제품 전체를 버리게 됩니다. 떨림이 발생할수록 주축을 단단히 붙잡고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야만 비로소 허용 공차 안으로 깎아낼 수 있지요. 다 깨진 주먹을 고쳐 쥐고 다시 적들에게 돌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기계 앞에서 쇳덩이 안 날려먹으려고 이 악물고 버티는 현장과 판박이였습니다. 통장 잔고를 보며 갉아먹히던 패배감은 어느샌가 단단한 투지로 형태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나 역시 매일 출근길 만원 버스와 쇳가루 자욱한 공장이라는 링 위에 올라가, 300만 원이라는 무거운 펀치를 묵묵히 받아내며 지지 않고 버티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도망치지 않고 버텨내는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스크린의 난투극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엔딩 끝나고 애들 방 문 열었다
처절했던 싸움을 끝마치고 깊은 상처를 입은 주인공이 차가운 기둥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는 장면을 끝으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습니다. 요란한 승리의 팡파르 대신 낮게 깔리는 음악만이 흘렀고, 화면의 푸른 빛이 서서히 꺼지며 거실은 다시 깊은 어둠에 묻혔지요. 주인공과 함께 거친 링 위를 구르고 나온 것처럼 온몸의 관절이 뻐근했고, 손에 쥐고 있던 빈 알루미늄 캔은 온기를 잃은 채 차가웠습니다. 소파를 짚고 일어나 굳어 있던 무릎을 펴자 뼈마디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슬리퍼를 벗고 양말 신은 발로 어두운 복도를 조용히 걸어가 아이들 방 문손잡이를 잡았습니다. 기름칠이 덜 된 경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가 아이들을 깨우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었지요.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두 아이의 규칙적이고 편안한 숨소리가 잔잔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는 베개에서 머리가 빠져나온 채 이불을 발치로 잔뜩 걷어차고 자고 있더군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다가가 둘째의 머리를 살며시 들어 베개 한가운데에 뉘어주었고, 땀이 약간 밴 큰아이의 이마를 쓸어 넘긴 뒤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 단정히 덮어주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어둠 속에서 고요히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습니다. 방문 문지방 너머의 세상은 치솟는 대출 이자와 팍팍한 잔고, 매일 실수 없이 쳐내야 하는 납기 압박이 도사리고 있는 살벌한 전쟁터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은 방 안쪽만큼은 그 어떤 세상의 칼바람도 함부로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평온한 보금자리여야만 했습니다.
잠든 평화를 지켜내는 게 매일 링 위에 올라가는 이유입니다. 내일 아침 7시에도 어김없이 알람은 울릴 것이고, 저는 다시 먼지 묻은 안전화 끈을 단단히 동여맬 것입니다. 공장으로 출근해 차가운 바이스를 조이고 녹색 사이클 스타트 버튼을 누르며 또 하루의 몫을 살아내겠지요. 가장이라는 자리는 뒤로 물러설 곳이 없기에, 제게 주어진 링 위에서 내일도 묵묵히 가드를 올리고 버텨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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