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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20대 공장 막내 시절 거친 눈빛이 떠오른 날

by 풍성함 2026. 9. 27.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공식 포스터

명치 끝이 묵직한 쇳덩이로 콱 틀어막히며 숨이 턱 멎는 감각이었습니다. 2004년 극장에서였습니다. 잔업을 겨우 마치고 기름때 묻은 작업복 바지만 대충 갈아입은 채 친구 손에 끌려 영화관에 들어갔던 날입니다. 손톱 밑에 새까맣게 박힌 쇠비린내와 절삭유 냄새가 비누로 아무리 문질러도 채 가시지 않던 스물넷 무렵이었습니다. 선반 돌아가는 모터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공장 막내 시절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바닥을 기며 쇳가루를 쓸어 담다 지친 몸으로 어두컴컴한 극장 의자에 몸을 파묻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극장에서 못 일어난 날

 

엔딩 크레딧 자막이 다 올라가고 상영관 천장의 형광등 불이 켜졌는데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코를 훌쩍거리며 외투를 챙겨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멍하니 굳은 채로 발밑의 어두운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일어날 힘조차 없었습니다. 극장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한참 동안 깊게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굳어 있던 턱관절이 서서히 풀렸습니다. 가슴 한가운데가 시퍼런 쇳조각에 긁힌 것처럼 얼얼했습니다. 영화 속 전장의 포화나 흙먼지 냄새가 이상하리만치 낯설지 않았습니다. 깎여 나간 뻘건 쇳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메케한 기름 연기가 진동하던 제 일터와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쟁통에 내던져져 어떻게든 동생 하나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악을 쓰던 형 진태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평양 시가지와 고지전의 참호 속에서 진태는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적진으로 뛰어들어 맨손으로 적군의 멱살을 잡고, 가슴에 훈장을 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칼을 휘두르던 그 섬뜩한 눈빛이 뇌리에 깊숙이 박혔습니다. 살기 위해, 그리고 내 식구 하나 지키기 위해 시작한 발버둥이 결국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려 놓는지 너무나 잔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제 눈에 비친 진태는 단순한 영화 속 전쟁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무자비한 세상 바닥에서 자기 핏줄 하나 건져내겠다고 온몸에 독기를 채워 넣은 처절한 가장의 얼굴이었습니다. 극장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가슴속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당장 몇 시간 뒤면 다시 굉음이 울리는 공장 바닥으로 기어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이, 진태가 뒹굴던 진흙탕 참호만큼이나 무겁고 아득하게 다가왔습니다.

 

진태 눈빛, 공장 거울 속 내 눈빛

 

내 식구를 지키려면 내가 괴물이 되어야 하는 건가.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 그 물음이 머릿속을 끈질기게 맴돌았습니다. 당시 제가 발을 들이고 있던 정밀 임가공 바닥도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이지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습니다. 갓 들어온 어린 신입에게 현장은 눈물 나게 매정하고 쌀쌀맞았습니다. 날카로운 쇠칩이 팔뚝을 스쳐 피가 맺혀도 선임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기계 원점을 조금이라도 잘못 잡거나 치수가 100분의 1밀리미터라도 틀어지면 곧바로 정강이를 차이거나 육두문자가 귓전을 때렸습니다. 실수 하나가 곧바로 수백만 원짜리 소재 불량으로 이어지는 곳이었으니,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공장에 들어간 지 7~8달 차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기계 밑바닥에 쪼그려 앉아 굳어버린 슬러지와 쇳가루를 긁어내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거칠게 손을 씻고 있었습니다. 노란 재생비누 거품을 찬물로 헹궈내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보았습니다. 거울 속에 서 있던 제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곳에는 스물넷 젊은 청년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누구에게나 달려들어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굶주린 들개 같은 눈이 박혀 있었습니다. 매일 쏟아지는 타박과 공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저도 모르게 눈에 독기를 잔뜩 채워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밀려드는 가공 물량과 거친 욕설 속에서 바보 취급당하지 않으려고, 나 자신을 온통 뾰족한 가시로 둘러치고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명분 하나로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아군까지 적으로 돌리던 진태의 얼굴이 거울 위로 그대로 겹쳐졌습니다. 독기를 품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튕겨 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아 억지로 만든 표정이었지만, 참 초라하고 씁쓸했습니다. 나 하나 지키겠다고 두른 두꺼운 껍데기가 결국 내 얼굴마저 저렇게 흉측하게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울을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갑옷에 칼날 달아 후임을 찌른 날

 

세월이 조금 흘러 제 밑으로 처음 신입 후임이 들어왔을 때 일입니다. 가공 도면 하나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엔드밀 교체 타이밍도 제대로 맞추지 못해 하루 종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녀석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납기 일정이 너무 촉박해 온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서 있었습니다. 팽팽 돌아가는 고속 스핀들 바로 옆에서 녀석이 당황한 나머지 위험천만하게 맨손을 쑥 집어넣는 순간이었습니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제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녀석의 작업복 뒷덜미를 거칠게 낚아채며 공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여기서 손 다치려고 환장했어? 팔 하나 날아가 봐야 정신 차릴래?" 선임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으며 치를 떨었던 그 거친 폭언을 제 입으로 똑같이 뱉어내고 있었습니다. 안전을 가르치겠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제 불안과 마감 피로를 가장 힘없는 녀석에게 쏟아부은 것뿐이었습니다. 호통을 치고 나서 씩씩거리며 녀석을 쳐다보았습니다. 몽키스패너를 쥔 채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고 있는 후임의 손과 잔뜩 겁에 질린 채 굳어버린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습니다. 불과 1년 전, 기름 묻은 면장갑을 낀 채 선임들 눈치만 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던 제 초라한 모습이 녀석의 얼굴에 겹쳐졌습니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고 무서워했던 그 차가운 눈빛과 칼날 같은 말씨를, 이제는 제 밑에 들어온 약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호하겠다고 두른 마음의 갑옷에 흉측한 칼날을 달아놓고 남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진태가 동생 진석이를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어 주변 사람들을 짓밟고 상처를 주었던 것처럼, 저 역시 밥벌이의 고단함을 핑계 삼아 똑같은 괴물 흉내를 내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녀석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힘들 만큼 지독한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편의점 파라솔, 캔커피 하나

 

공장 정문 앞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녀석을 앉혔습니다. 가게 안 온장고에서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집어 들고 나와 녀석의 기름 묻은 차가운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캔 뚜껑만 긁적이며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의 곁에서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형이 아까 말이 너무 심했다. 다칠까 봐 놀라서 그랬는데, 진짜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 그 쉬운 한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왜 그리 목구멍에 턱 걸리고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녀석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캔커피를 든 채 고개만 연신 꾸벅였습니다. 어색하게 사과를 건네고 파라솔에 걸터앉아 녀석의 축 처진 둥근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거칠게 굴어야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는 걸, 잔뜩 움츠러든 그 어깨를 보며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그때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손에 쥐었던 캔커피의 미지근한 온기는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제 손끝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100분의 1밀리미터 공차를 다투는 CAD/CAM 프로그램을 짜고 공정을 잡는 기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하루하루 납기 압박과 통장 잔고의 무게를 짊어진 40대 가장이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이나 퇴근 후 집에서 저를 반기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심코 날 선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그 시절 공장 거울 속 들개 같았던 눈빛과 편의점 파라솔에서의 부끄러움을 떠올립니다.

 

내일도 기름 냄새와 기계 굉음이 가득한 현장으로 출근해야 합니다. 지치고 빡빡한 가장의 무게가 때로는 어깨를 짓누르더라도, 내 사람들에게만큼은 차가운 칼날을 겨누지 않는 단단하고 온기 있는 기술자로 버텨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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