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에서는 기계 고주파 소리가 여전히 윙윙 맴돌고, 눈을 감아도 모니터 속 툴패스 궤적 잔상이 허공에 어른거리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정밀 가공 현장에서 하루 종일 날카로운 절삭유 냄새와 회전체 소음에 절어 있다가 나오면,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도 신경망은 시퍼렇게 살아남아 침대에 누워도 머리가 멈추질 않습니다. 공장 셔터를 내리고 시계를 보니 밤 11시 반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 사 들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서니 자정 12시 반이었지요. 아이들과 아내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고, 조용히 샤워를 하고 거실 구석에 앉았더니 시계는 어느새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빅매치 본 날, 밤 11시 반 퇴근에 새벽 1시 재생
야간 잔업을 끝내고 멍하니 앉아 캔맥주 하나를 깠는데, 머릿속 복잡한 잡념을 싹 날려버릴 무언가가 절실했습니다. 이 시간에 골치 아프게 꼬아둔 반전 스릴러를 보면서 범인이 누구인지 머리 굴릴 여력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지요. 복잡한 서사나 철학적인 메시지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앞뒤 안 가리고 시원하게 때려 부수는 오락물 하나만 걸리길 바랐습니다. OTT 화면을 멍하니 휙휙 넘기는데 이정재 얼굴이 피칠갑이 된 채 질주하는 포스터 하나가 눈에 턱 걸렸습니다. 납치된 형을 구하겠다고 온 도심을 맨몸으로 뛰어다니는 격투기 선수 이야기라는데, 딱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복잡한 머리 비우기엔 딱이겠다 싶더군요.) 영화는 시작부터 뜸을 들이지 않고 주인공 최익호를 서울 한복판이라는 거대한 게임판 위로 사정없이 내던져버립니다. 신하균이 연기한 악당 에이스가 설계한 미션들을 깨부수며 건물 외벽을 타고 형사들과 조폭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리는데, 그 무식할 정도로 솔직한 돌격형 속도감이 가슴을 뻥 뚫어주더군요. 체면이나 계산 따위는 다 집어던진 채 형 하나 살리겠다고 무작정 뛰고 구르는 모습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토리의 인과관계나 현실성을 따질 틈도 주지 않고 내달리는 그 정직한 직진 액션 덕분에, 새벽 1시에 굳어있던 피가 비로소 빠르게 도는 것 같았습니다.
0.01mm 오차와 씨름하는 사람의 일상
제가 매일 마주하는 현장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주먹을 마구 휘두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공구 경로에서 단 0.01mm만 수치가 틀어져도 수백만 원짜리 금형 블록이 단숨에 고철 덩어리로 전락해 버리니까요. 그날로 시말서 쓰는 건 둘째치고 날려먹은 원자재값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합니다. 가공 프로그램 엔터 키 하나를 누를 때마다 손가락 끝이 저릴 정도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15년 차 가공 기술자의 일상입니다. 사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기술직 가장에게 새벽까지 잠을 줄이는 것은 거의 자해나 다름없는 짓입니다.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멍해지면 공구 세팅 미스가 나고, 고가의 팁이 깨지거나 납기 지연으로 이어져 공장 전체가 난리가 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쇳가루가 목구멍 끝까지 꽉 차오른 것 같은 날이 찾아옵니다. 하루 종일 도면 치수 계산하고, 절삭 조건 조절하고, 공구 마모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긴장감은 이미 직장에서 차고 넘치도록 감당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단 1초도 제 마음대로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기계 피드 속도를 조금만 올려도 툴이 부러질까 노심초사해야 하고, 거래처 납기 일정과 자재비 상승 압박 앞에서는 늘 숨을 죽여야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화면 속에서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으로 들이받아 부숴버리는 익호의 무식한 돌파력이 대리만족을 넘어선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빅매치·범죄도시가 준 것, 금기된 해방감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범죄도시의 마석도 형사가 떠올랐습니다. 복잡한 법 절차나 규정 같은 것은 뒤로 미뤄두고, 악당의 멱살을 잡아 벽에 꽂아버리는 그 주먹 타격음 하나를 들을 때마다 제 가슴속에 얹혀있던 묵직한 쇳덩어리가 쾅 하고 부서지는 기분이 듭니다. 공장 안에서는 언제나 머리 위에 '안전제일' 표지판이 걸려 있고, 우리는 정해진 매뉴얼과 규격 속에서만 조심스럽게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규율을 벗어나는 순간 대형 사고가 터지는 바닥이니까요. 매일 그 통제된 안전선 밑에서 숨죽여 일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일종의 금기된 해방감 같은 것이 바로 이런 영화들에 있습니다. 수치와 공차,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비 계산으로 꽉 막혀 있던 숨통을 도끼로 거칠게 찍어 열어주는 산소통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두들겨 맞고 찢겨도 다시 일어나 달리는 그 미련한 질주를 보고 있자니, 가슴 안쪽에서 끈적하게 엉켜있던 하루치 잔업 스트레스가 땀구멍으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했습니다. 캔맥주 바닥을 비우고 TV를 껐을 때는 새벽 3시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또 버텨내려고 마음속 엔진 강제로 식히는 쿨러 같은 시간이었지요.
저는 한 달에 한두 번, 쇳내에 질식할 것 같을 때 이 짧고 무식한 일탈을 온전히 저 자신한테 허락하곤 합니다. 이렇게라도 속을 싹 비워내야 내일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또다시 소수점 공차와 싸우며 우리 가족의 밥벌이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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