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알이 모래알처럼 껄끄럽게 넘어가더군요. 원청 이사라는 양반이 부른 호텔 일식당 자리였는데, 도면 이야기 대신 엉뚱하게 골프 핸디와 회원권 시세가 오가던 자리였습니다. 모니터 앞에서 CAM 경로 잡고 가공 시간 10초 줄이겠다고 칩 비산 덮개만 쳐다보다가 이런 호화로운 룸에 앉아 있으니 몸에 맞지 않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기분이었습니다. 기름 냄새 밴 점퍼 대신 억지로 다려 입은 셔츠 목덜미가 유독 답답했습니다. 형광등 아래서 종일 눈알 굴리며 좌표값 찍던 피로가 그대로 얹혀서 그런지, 맞은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며 겉돌았습니다. 그들은 잔을 부딪치며 이번 주말 라운딩 약속을 잡고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그저 하루라도 기계가 서지 않고 불량 없이 도는 게 유일한 일정인데 말입니다.
일식당 미팅, 밥알이 모래알처럼 넘어간 날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남녀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대화를 이어가던 장면이 있습니다. 그 답답하고 어색한 공기가 딱 그날 일식당 테이블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그쪽 사람들은 요즘 와인 트렌드가 어떻고 자식들 방학 어학연수를 미국 동부로 보낼지 서부로 보낼지 아주 태연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다른 나라 언어처럼 들리는 화제들이었습니다. 눈앞에는 번쩍거리는 접시 위에 두툼한 사시미와 정갈한 도미 솥밥이 차례로 올라왔습니다. 점심때 공장 식판에 대충 퍼 담던 제육볶음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속이 메슥거리고 단맛도 짠맛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씹을수록 질겨지는 참치 살점을 삼키는 내내, 제 머릿속에서는 이번 달 둘째 아이 영어 학원비 결제일과 주말에 마트에서 찍힐 장바구니 영수증 금액만 쉴 새 없이 계산되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웃으며 건네는 질문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삶의 여유라는 것은 애초에 공차 100분의 1밀리미터를 맞추려고 밤샘 가공을 돌리는 저 같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이 서로 다른 세계의 벽을 실감하며 어색하게 미소 짓던 그 찰나의 표정이 딱 제 얼굴이었을 겁니다. 비싼 음식을 앞에 두고도 주눅이 드는 건지, 아니면 이 피로감이 밥맛을 앗아간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서를 챙기는 원청 사람들 뒤를 따라 식당을 빠져나왔습니다. 배는 분명 터질 것처럼 불렀는데 속은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꽉 막혀 있었습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다 말고 근처 편의점으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계산대 옆에 놓인 천 원짜리 까스활명수 한 병을 사서 뚜껑을 따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톡 쏘는 탄산과 씁쓸한 약 냄새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서야 굳어 있던 턱관절이 겨우 풀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단가 협상, '맞춰보겠습니다' 헛웃음의 대가
식사가 끝나갈 무렵 결국 본론이 나왔고, 원청 담당자는 태연한 얼굴로 기존 가공 단가에서 3%를 더 깎아야 발주를 줄 수 있다고 통보했습니다. 알루미늄 원자재 가격도 올랐고 공구대 감가상각에 인서트 팁 마모 비용까지 따지면 이미 마진이 10% 턱걸이 수준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내려가면 마진 7%도 간당간당해서 사실상 장비 돌리는 전기세와 절삭유 값만 건지는 구조였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이 단가에는 절대 기계 못 건다고 받아쳐야 맞았습니다. 아무리 정밀 가공을 15년 동안 해왔어도 남는 게 없으면 남의 기계만 닳게 만드는 꼴이니까요. 답이 안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전혀 달랐습니다. 헛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리며, 공정을 다시 짜서 어떻게든 단가를 한번 맞춰보겠다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극 중에서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던 인물의 처량한 타협이 제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회사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인 발주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방금 전 식당에서 비위 맞추며 굽신거렸던 대가가 고작 이 얄팍한 숫자였나 싶어 허탈함이 몰려왔습니다. 주머니에 든 담배갑을 만지작거리며 밖으로 나가 한 대 진하게 태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당장 다음 주에 나갈 직원들 월급과 매달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머시닝센터 리스료, 공장 임대료 같은 고정비가 목을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남는 게 없다고 일감을 걷어차 버리면 내일부터 놀아야 하는 기계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결국 서랍에서 법인 도장을 꺼내 계약서 하단에 묵직하게 찍어 원청으로 팩스를 전송했습니다. 도장의 붉은 인주를 보면서 씁쓸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장 뒷모습과 절삭유 냄새, 공장 불 꺼진 뒤
작업장으로 내려가니 기계 돌아가는 둔탁한 소음 사이로 반장이 열심히 가공물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척에 공작물을 세팅하며 눈금을 확인하는 그의 구부정한 등판을 보니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영업하고 설계하는 놈이 밖에서 제값을 깎이고 들어왔으니, 결국 그 손해는 현장에서 공구 회전수 올리고 사이클 타임 줄여가며 손가락을 더 바쁘게 놀려 메워야 했습니다. 단가를 깎였으니 공구 이송 속도를 무리하게 올려야 하고, 그러면 팁 마모가 빨라져 불량률 잡기가 더 까다로워집니다. 반장에게 공정 조건 변경된 도면을 건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습니다. 현장 기술직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올라왔으면서, 정작 현장 식구들 밥그릇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다. 잔업이 모두 끝나고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한 뒤, 메인 배전반 스위치를 내리고 공장 불을 껐습니다. 기계들이 식어가며 내는 미세한 금속성 수축음과 사방에 밴 절삭유 특유의 시큼하고 쇠비린 냄새만이 어두운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기계 앞 통로에 혼자 멍하니 서서 컴컴한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가 결코 온전히 섞이지 못한 채 남겨진 영화의 뒷맛처럼, 어둠 속 텅 빈 공장의 적막도 유독 길게 달라붙었습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과 기계 좌표 사이에 갇혀 있었는데, 불 꺼진 공장에 남겨진 순간에야 비로소 제가 지나온 오늘 하루의 무게가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둘째 녀석이 아빠 왔냐며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습니다. 조그만 손으로 제 다리를 끌어안는 아이의 온기를 느끼는 순간, 낮 동안 가슴속을 짓누르던 텁텁한 감정들이 이상하게 가라앉았습니다. 학원비 안 밀리려면 내일도 또 허리 숙여야지요.
신발을 벗고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 자존심 상하던 일식당과 깎여나간 단가에 대해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다시 출근해서 공차 5마이크론을 맞추기 위해 좌표를 찍고 기계를 돌려야 합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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