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물 틀어놓고 혼자 소리 죽여 삼켰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밤은 TV에서 틀어주던 영화 위대한 쇼맨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세탁기에 대충 던져 넣고 씻지도 못한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늦은 밤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MCT 도어 열고 닫으며 치수를 재고, 소수점 세 자리 공차 맞추느라 눈알이 뻐근하던 날이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납기일과 가공 불량 생각뿐이었는데 거실 공기는 유독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방에서 곤히 잠들어 숨소리만 색색 새어 나왔고 아내도 파김치가 되어 먼저 누운 시간이었지요. 피로에 절어 멍하니 굳어 있던 손가락으로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마주친 그 화려한 화면이 제 가슴 한쪽을 거칠게 긁어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위대한 쇼맨, 채널 못 돌린 이유
퇴근하고 돌아와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귓전을 때리는 웅장한 음악 소리에 홀린 듯 리모컨을 멈췄습니다. 화면 안에서는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사내가 번쩍이는 조명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더군요. 평소 같았으면 저런 비현실적인 뮤지컬 영화는 몇 초 보지도 않고 바로 뉴스나 유튜브로 넘겼을 겁니다. 하루 종일 쇳가루 날리고 절삭유 냄새 풍기는 현장에서 시달리다 온 40대 기술자에게 저런 번쩍거리는 무대는 딴 세상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채널을 도저히 돌릴 수 없었던 건 그 번쩍이는 무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 바넘이 회사가 망해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나앉은 뒤, 낡은 옥상 방에서 식구들과 둘러앉아 있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린 딸의 생일인데 그럴듯한 케이크 하나 사주지 못해서, 사과 한 알에 작은 촛불 하나 겨우 꽂아두고 입김을 불게 하더군요. 그 초라한 사과 한 알을 보는데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이 바닥으로 툭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 순간 남자의 눈빛에 스치는 감정이 뭔지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서 자식 앞에서 웃는 얼굴 뒤로 피가 마르는 그 막막함이 화면을 뚫고 제 거실까지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화려한 서커스 단원들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장면보다, 그 작고 볼품없는 사과 한 알이 제 숨통을 더 세게 조여왔습니다. 저 사람도 가장이었고, 저 사람도 식구들 밥줄 쥐고 흔들리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겁니다.
자식 앞에서 어깨 펴던 가장의 속
자식 앞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척 어깨를 쫙 펴야 하지만, 돌아서면 속박이 썩어 문드러지는 게 가장의 진짜 모습이지요. 바넘이 딸들에게 멋진 성을 지어주겠다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주겠다고 호기롭게 큰소리칠 때 저는 그 남자의 떨리는 턱 끝을 보았습니다. 속으로는 내가 정말 저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내일 당장 쌀 떨어지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을 겁니다. 저 역시 아이들이 장난감 가게 앞에서 눈을 반짝일 때마다 겉으로는 허허 웃으며 사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음 달 결제일을 계산하느라 식은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야근을 하고 특근을 뛴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잔업 수당 몇 푼 더 받아보겠다고 밤 10시까지 공장 불을 밝히고, 주말에도 현장에 나가 묵직한 바이스를 조이고 엔드밀 마모 상태 확인하며 가공 조건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이미 자고 있고, 식은 밥상머리에서 혼자 숟가락을 들 때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더군요. 가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내가 가장 곁에 있어야 할 온기를 스스로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서글픔이 늘 가슴 한구석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월급날을 딱 일주일 남겨두었던 그 즈음의 어느 날이 떠올랐습니다. 퇴근길에 현금 좀 찾아두려고 들렀던 동네 GS25 편의점 ATM 모니터에 잔액 3만 4천 원이라는 숫자가 찍혔을 때의 감각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순간 기계 화면이 멈춘 줄 알고 카드를 몇 번이나 다시 넣었다 뺐는지 모릅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목이 바짝 타서 담배 한 갑이라도 사서 태우려 카운터로 걸어갔습니다. 카드가 한도 초과로 긁히지 않을까 봐, 어린 알바생 얼굴 쳐다보기가 겁이 나서 그 담뱃갑 하나 집어 들지 못하고 빈손으로 쫓기듯 편의점을 빠져나왔습니다.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귓가에서 이명처럼 삐- 하는 소리가 멈추지 않더군요. 집에 들어서니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긋방긋 웃고 있었고, 그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제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 재만 남았습니다.
포인트·동전 털어 기저귀 한 팩, 그날 밤
제일 비참했던 순간은 기저귀가 똑 떨어졌던 날이었습니다. 통장엔 돈이 한 푼도 없고 지갑 속 신용카드는 이미 한도까지 차올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 눈치를 피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 굴러다니던 돼지 저금통 배를 가르고, 옷장 서랍에서 100원짜리 동전들을 긁어모았습니다. 휴대폰 앱을 켜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카드 포인트와 OK캐쉬백 점수를 영혼까지 긁어모아 동네 할인마트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계산대 벨트 위에 기저귀 한 팩을 올려두고, 점원에게 포인트 먼저 차감해 달라고 말한 뒤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동전 뭉치를 쏟아냈습니다. 뒤에는 퇴근하고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서 제 등을 쳐다보고 있더군요. 점원이 동전을 하나하나 세는 그 몇 십 초가 제 인생에서 가장 길고 굴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차라리 바닥이 갈라져서 숨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굳게 닫힌 화장실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쪼그려 앉아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놓고, 쏟아지는 물소리에 맞춰 혼자 끅끅거리며 소리를 죽여 삼켰습니다. 내 새끼 기저귀 하나 제값 주고 편하게 사지 못하는 무능한 애비라는 자괴감이 온몸을 짓눌렀습니다. 영화 속 바넘이 옥상에서 사과에 촛불을 꽂던 그 비참함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날 밤의 지독한 울음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부리던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한 방을 노리던 실없는 요행이 그날 밤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20대 철없던 시절 품었던 막연한 환상은 다 깨졌고, 소수점 단위 치수를 맞추기 위해 마이크로미터를 꽉 쥐듯 내 현실을 똑바로 쥐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내가 흔들리면 내 뒤에 있는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니까요.
비바람 막아주는 콘크리트 벽처럼 버텨내는 게 내 몫이라는 걸 그 화장실 바닥에서 뼈에 새겼던 것 같습니다. 그 뼈저린 결심을 한 지 십수 년이 흘렀고, 지금의 저는 여전히 기름 냄새와 쇳가루 사이에서 매일매일 그 약속을 묵묵히 지켜내고 있습니다. 비록 영화 속 바넘처럼 화려한 쇼의 주인공이 되어 갈채를 받지는 못하지만, 내일 아침도 작업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채우고 기계 소리 요란한 공장 바닥으로 담담하게 걸어 들어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