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급했던 마음에 작지만 단단한 쉼표 하나 찍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온종일 CAM 소프트웨어 화면에 코를 박고 공구 경로를 쪼개다 돌아온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여운 하나가 독립영화 한 편에서 불쑥 튀어나왔네요. 씻고 나와 식탁에 앉으니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애들은 벌써 방에 들어가 잠들었고, 싱크대 옆에는 마르지 않은 젖병 대신 큰놈 학원 교재가 무겁게 얹혀 있었습니다. 시원한 냉수 한 잔 들이켜며 휴대폰 리모컨을 쥐었는데, 눈앞에 여전히 가공 경로 선이 잔상처럼 둥둥 떠다녔습니다. 소수점 셋째 자리 공차를 맞추느라 잔뜩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벽만 쳐다봤습니다. 피로가 덜컥 내려앉는 밤이었습니다.
기술자가 독립영화에 끌린 날
OTT 화면에서 영화 목록을 넘기다 독립·예술 영화 구석에 멈췄습니다. 솔직히 평소에는 때려 부수고 추격전 벌이는 액션 영화나 찾아봤지, 잔잔한 저예산 영화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진주의 진주'라는 담백한 제목이 묘하게 눈에 밟히더군요. 포스터 속에 걸린 낡은 극장과 빛바랜 골목 풍경이 눈을 잡아끌었습니다. 매일 공장 바닥에서 기름 냄새 맡고, 모니터 속 반듯한 직선만 들여다보는 제 일상과는 전혀 딴판인 그림이었습니다. 씻고 누워 잠이나 청할 생각으로 별 기대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영화는 재개발로 곧 헐릴 위기에 처한 삼각지 다방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50년 세월이 켜켜이 묻은 삐걱거리는 나무 테이블과 붉은 벽돌, 그리고 철거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벽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보는데 리모컨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사라져 가는 공간을 어쩌지 못해 바라보는 그 답답한 공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10년 넘게 공작기계 기름밥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손때가 묻어 시커멓게 변한 낡은 공구들과 기름때에 찌든 나무 작업대가 제 손을 키웠습니다. 세상은 날마다 번쩍거리는 새 건물을 올리고 더 빠른 기술을 자랑하지만, 제게는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던 그 투박한 물건들이 훨씬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미쓰토요 캘리퍼스, 15년 전 손 벌벌 떨며 결제
제 자리 책상 서랍 안쪽에는 15년 된 미쓰토요 디지털 캘리퍼스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하도 손으로 쥐고 만져서 모서리 각이 전부 닳았고, 플라스틱 케이스는 반질반질 윤이 날 지경입니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서랍 몇 번째 칸에 몇 파이짜리 앤드밀이 있는지 손가락 끝 감각이 먼저 알아채더군요. 그 캘리퍼스를 샀던 15년 전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20대 중반, 현장 막내 시절에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공구상가에 가서 손을 벌벌 떨며 결제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격표에 적힌 4만 얼마짜리 숫자가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때 제 첫 월급이 딱 120만 원이었습니다. 하루 만 원짜리 한 장으로 밥값과 담배값을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시절이었으니, 4~5만 원은 월급의 5%에 육박하는 거금이었습니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가게 문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그러다가도 주머니 속 딱딱한 캘리퍼스 케이스를 손으로 쥐어보니 이상하게 허리춤이 꼿꼿해졌습니다. 비로소 나도 진짜 기술자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혹여나 흠집이라도 날까 봐 작업이 끝나면 면장갑 자투리 헝겊으로 뽀득뽀득 닦아서 케이스에 고이 모셔두곤 했습니다. 지금은 쇳가루에 긁히고 칩에 찍힌 자국투성이가 되었지만, 그 흠집마다 제가 버텨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박혀 있습니다.
버튼 하나에 밀려나는 서늘함, 반나절이 30분에 정리됐다
요즘 공장에 들어오는 최신 머시닝센터들을 보고 있으면 속이 참 복잡해집니다. 화면 터치 몇 번이면 기계가 알아서 오차를 보정하고, 공구 마모도까지 센서가 척척 계산해 냅니다. 20대 시절에 쇳밥 튀어가며 수없이 손가락 베이고 데어가며 몸으로 체득했던 그 감각들이, 이제는 화면 속 버튼 하나에 쉽게 지워져 나가는 것 같아 뒷목이 서늘해지곤 합니다. 마치 제가 딛고 서 있던 단단한 땅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작업 환경이 쾌적해진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인데도, 마음 한구석은 늘 뒤숭숭했습니다. 사람이 땀 흘려 채우던 자리를 매끄러운 알고리즘이 대신 메워나가는 걸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씁쓸하더군요. 예전에는 단품 하나 깎으려고 면판 물리고 다이얼 게이지 얹어가며 반나절, 대여섯 시간을 온몸으로 갈아 넣었습니다. 기계 소음 속에서 땀을 비 오듯 쏟으며 겨우 공차를 맞췄습니다. 그런데 신형 5축 장비는 똑같은 형상을 프로그램 한 번 돌려 30분 만에 깔끔하게 뽑아냅니다. 도면에 적힌 치수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불량 하나 없이 매끄럽게 깎여 나온 가공품을 집어 드는데, 가슴속에 시커먼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헛웃음만 터져 나왔습니다. 내가 그동안 쏟아부었던 고생과 세월의 무게가 겨우 30분짜리 가공 시간에 맥없이 정리되어 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캘리퍼스에 쉼표 하나
영화 속 인물들도 그랬습니다. 거대한 자본과 재개발이라는 거센 흐름 앞에서 50년 된 다방 하나 지키겠다고 버티는 모습이, 얼핏 보면 참 미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미련함이야말로 그들이 지나온 삶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이었을 겁니다. 효율만 따지는 세상에서 손때 묻은 것들의 가치를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태도에 묘하게 동질감이 들었습니다. 영화 다음날 아침, 출근해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책상 서랍을 열었습니다. 공구함 구석에 묵직하게 놓여 있는 낡은 캘리퍼스를 한참 쳐다보며 속으로 한마디 건넸습니다.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결국 최종 치수를 확인하고 기계 문을 열어 공작물을 꺼내는 건 사람의 손입니다. 신형 설비가 밀려오고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돌아가도, 제 손끝에 새겨진 15년의 감각까지 통째로 지워지지는 않을 거라 믿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납기 맞춘 도면이 잔뜩 밀려 있고 공장 바닥은 굉음으로 가득 차겠지만, 덤덤하게 내 몫의 치수를 깎아 나갈 생각입니다. 애들 학원비 챙겨 넣고 식구들 건사하려면 다시 안전화를 단단히 묶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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