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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본 뒤 떠오른 불필요한 호의와 사람 보는 눈

by 풍성함 2026. 9. 17.

부탁 하나만 들어줘 영화 공식 포스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옆에 앉아 있던 집사람이 리모컨을 낚아채서 셋톱박스 홈화면으로 팍 넘겨버렸습니다. 화면이 꺼멓게 꺼지기도 전에 리모컨 플라스틱 모서리가 거실 테이블에 탁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요. 두 시간 내내 스크린을 채우던 화려한 원색의 옷감들과 번지르르한 뉴욕 상류층 말투들이 그 소리 한 방에 거실 공기에서 싹 날아갔습니다. 남들은 스릴러 반전이 기가 막히네, 여자 둘이 서로를 뜯어먹는 심리전이 매섭네 떠들어댑니다. 제 눈에는 그저 내일 가공해야 할 알루미늄 블록 수량과 도면 치수 생각만 머릿속을 꽉 채웠습니다. 하루 열두 시간씩 모니터에 머리 박고 0.01밀리미터 공차 맞추느라 눈알이 뻑뻑한 마당에, 저렇게 밑천도 없이 남의 호의 껍데기만 살살 긁어먹으며 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습니다. 영화 속 막장 싸움판보다 당장 내일 아침 공장에 들어가서 기계 돌려야 하는 현실이 훨씬 더 무겁게 다가왔지요.

 

1. 부탁 하나만 들어줘, 크레딧 올라가자마자 현실로

영화는 간단합니다. 살림 브이로그나 찍는 순진한 과부 스테파니 앞에, 세련되고 완벽해 보이는 워킹맘 에밀리가 나타납니다. 에밀리는 비 오는 날 마티니를 말아주며 인생의 비밀이라도 나눈 것처럼 굴더니, 아이 하교 좀 대신 봐달라며 '부탁 하나만 들어줘'를 던지고 사라집니다. 영화는 그때부터 실종이니 보험금이니 온갖 추잡한 비밀을 줄줄이 토해냅니다. 보는 내내 감탄이 나오는 게 아니라 헛웃음만 삐져나왔습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는 건 초등학교 앞 구멍가게만 가도 아는 이치입니다. 정밀 가공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면대로 깎아내서 검사성적서 찍혀 나와야 돈이 입금되는 법이지, 과정 없이 뚝딱 굴러떨어지는 결과물은 전부 불량입니다. 스테파니라는 인물은 상대가 툭 던진 매력적인 껍데기에 취해 자기 생활을 다 내어줍니다. 그걸 두고 현대인의 외로움이니 뭐니 포장하는 평론가들 글을 보면 참 속 편한 소리들 하신다 싶습니다. 저 사람들은 일당 떼일 걱정도 없고, 대출 원리금 나갈 날짜에 통장 잔고 들여다보며 담배 태울 일도 없는 모양입니다. 턱밑까지 기름 튀어가며 쇠 깎아 본 사람들은 압니다. 낯선 인간이 대가 없이 다가와 알량한 친절을 베풀 때, 그 뒤에 숨겨진 청구서가 얼마나 살벌한지요. 영화 속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저한테 서스펜스가 아니라, 그냥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패가망신하는 흔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의 촌극으로 보였습니다. 집사람이 찌개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얹으며 한마디 툭 던지더군요. 저런 짓도 시간 널널하고 쓸데없는 생각 많은 것들이나 하는 거라고요. 그 말이 딱 맞았습니다. 야간 잔업 뛰고 녹초가 돼서 들어온 가장의 눈에는, 저들이 짓밟고 다니는 그 잘난 일상이 사치스럽다 못해 한심해 보였습니다. 화면이 꺼지자마자 밀려드는 건 영화에 대한 여운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 8시 조례 전까지 납품 수량 맞춰야 한다는 묵직한 압박감뿐이었습니다.

 

2. 아랫집 이웃, 석 달짜리 싹싹함의 정체

스크린 속 에밀리의 그 서늘하고 뻔뻔한 얼굴을 보면서, 몇 해 전 우리 아파트 아랫집에 살던 사람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이사 온 첫날 떡을 돌리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하던 양반이었습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마주치면 제가 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굳이 뺏어 들고, 애들 손에 과자 쥐여주며 살갑게 굴었지요. 석 달 동안을 그렇게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싹싹하게 굴었습니다. 그 석 달짜리 알량한 싹싹함의 정체는 결국 300만 원만 융통해 달라는 부탁으로 끝이 났습니다. 주말 낮에 슬리퍼 끌고 올라와서 현관문 틈으로 손을 비비며 사정이 딱하게 됐다고 혀를 차더군요. 당장 다음 주에 풀리는 돈이 있는데 며칠만 메우면 된다면서, 이웃사촌끼리 좋게 생각하자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습니다. 공구 마모돼서 치수 터졌을 때 둘러대는 하청업체 핑계보다 더 뻔한 소리였습니다. 안 됩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남한테 빌려줄 여유 돈 같은 거 없습니다, 하고 칼같이 잘랐습니다. 그 순간 그 양반 눈빛이 1초 만에 차갑게 굳어버리더군요. 방금 전까지 형님 동생 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혀를 쯧 차며 뒤돌아서서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갔습니다. 호의를 거절당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내는 꼴이, 영화 속에서 자기 비밀 들키자마자 총구부터 들이밀던 에밀리와 판박이였습니다. 그 사람은 반년도 안 돼서 야반도주하듯 야밤에 짐 싸 들고 딴 동네로 이사 가버렸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그 짓거리로 몇백씩 뜯어먹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밤 제 집사람은 빨래 개다 말고 수건을 바닥에 탁 내던지며 물었습니다. "빌려줬어? 안 빌려줬지?" 제가 고개 젓는 걸 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리더군요. 식탁에 앉아 캔맥주 꽁지를 찌그러뜨리며 집사람이 단단히 못을 박았습니다. "밖에서 이유 없이 친한 척 엉겨 붙는 사람한테 절대로 마음 주지 마." 그 차가운 캔 찌그러지는 소리가 제 귓가에 딱 박혔습니다. 피 땀 흘려 가공비로 벌어들인 내 돈 몇 푼 뜯어먹으려고, 온갖 알랑방귀 뀌어가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다시 배웠습니다. 에밀리의 마티니 잔 밑바닥에 깔려 있던 것도 결국 그 아랫집 사람이 던진 300만 원짜리 덫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3. 학부모 아빠 모임, 5천 원으로 선 그은 날

첫째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일입니다. 동네 아빠들끼리 친목이나 도모하자며 불려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근처 카페 구석자리에 넷이 앉았는데, 처음 십 분은 날씨 얘기며 차 얘기로 그럴듯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슬슬 본색들이 나오더군요. 모임을 주도하던 사람이 자기 아이가 다니는 영어 학원 레벨을 들먹이더니, 다른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며 '특별히' 자기네 팀에 끼워주겠다는 소리를 얹었습니다. 학원비가 한 달에 백오십이 넘는데 서너 명 모아서 그룹을 짜면 단가를 깎을 수 있다나 뭐라나. 자기가 원장하고 형님 동생 하는 사이라 특별히 우리 애들까지 넣어주겠다는 그 얼굴을 보는데 헛웃음이 픽 나왔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일감 주는 것처럼 생색내면서 단가 후려치려는 거래처 사람들 수법하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습니다. 결국 자기 자식 학원비 아끼려고 남의 집 주머니 털겠다는 계산속이었습니다.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 자리에서 들이켜고, 주머니에서 구겨진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 꺼내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뒀습니다. 가방 둘러메고 의자 밀어 넣은 뒤에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납니다" 하고 문 열고 나왔습니다.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온 5천 원은 그냥 커피값이 아니었습니다. 너랑 나 사이에 인간적인 인연은 여기서 완전히 끝났다고 확실하게 선을 긋는 칼자루였습니다. 괜히 애매하게 앉아서 맞장구쳐주다가는 애먼 빚만 지고 내 자식 앞세워 코 꿸 게 뻔했으니까요. 카페 문을 열고 나와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발걸음이 기가 막히게 가벼웠습니다. 애초에 각이 안 나오는 관계는 0.1밀리미터의 틈도 주지 말고 쳐내야 뒤탈이 없습니다. 영화 속 스테파니처럼 어설픈 인정에 휘둘려 남의 부탁 들어주다 보면, 내 손발 묶이고 내 가족 지킬 울타리까지 다 뜯겨 나가는 꼴을 면치 못합니다.

 

이유 없이 살갑게 굴면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 버릇이 생긴 뒤로는 사람들 입발림에 속아 시간 뺏기고 속 썩는 일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세상은 도면대로 냉정하게 돌아갈 때 가장 탈이 없는 법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변함없이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기름 냄새 밴 작업복을 챙겨 입고 현장으로 나갈 겁니다. 내 손으로 정직하게 깎아 만든 쇳덩이와, 매달 꼬박꼬박 내 힘으로 지켜내는 내 새끼들의 밥그릇만이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진짜배기 삶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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