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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아가일 솔직한 쓴소리, 15년 차 기술직의 B급 해열제

by 풍성함 2026. 10. 20.

아가일 영화 공식 포스터

골치 아픈 날 혼자 처방해 먹는 2시간짜리 해열제 같은 영화였습니다. 납기일 맞추느라 이틀 내내 CAM 프로그램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앉아 있었더니, 눈알이 뻑뻑하다 못해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절삭유 냄새가 콧속에 밴 채로 공장 셔터를 내리고 집에 들어오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더군요. 조용히 씻고 나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유통기한 간당간당한 캔맥주 하나가 보였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는 이미 안방에서 곯아떨어졌고, 거실에는 적막만 가득했습니다. 소파에 몸을 파묻는데 허리뼈마디가 뻐근하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주간 내내 100분의 1밀리미터 공차 맞춘다고 도면 씨름을 했더니 머릿속 전원 스위치가 고장 난 상태였습니다. 이럴 때는 생각이라는 걸 완전히 멈춰야 잠이 옵니다. 스마트폰 리모컨을 뒤적거리다 보니 영화 목록 맨 위에 익숙한 감독 이름 석 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복잡한 계산도, 줄거리 해석도 필요 없는 화끈한 첩보 액션이나 한 편 보면서 뇌를 비워보자는 심정으로 결제 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아가일 결제, 킹스맨 감독에 낚인 금요일 밤

금요일 야간 잔업을 마치고 소파에 쓰러져 캔맥주를 딸 때까지만 해도 제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킹스맨으로 그 유명한 매튜 본 감독 작품에다가, 덩치 좋고 믿음직한 헨리 카빌이 각 잡힌 수트를 입고 메인 포스터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술자 생활 15년 하면서 공정 계획 짤 때 가장 위험한 게 바로 검증 안 된 데이터를 믿는 건데, 피곤에 절어 있으니 그런 기본 원칙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포스터에 박힌 이름값과 때깔 좋은 예고편 썸네일에 완전히 낚여버린 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화면 색감도 쨍하고 음악도 경쾌하게 터져 나와서 꽤 그럴싸해 보였습니다. 헨리 카빌이 각진 머리를 하고 날렵하게 총을 쏴대길래, 최소한 본전 생각은 안 나겠구나 싶어 캔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몸에 밴 피로를 화끈한 총격전으로 털어내려던 제 계산이 아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공장에서 기계 회전수와 이송 속도를 칼같이 맞춰놓고 첫 가공물이 매끄럽게 깎여나갈 때 느끼는 그런 안도감이 살짝 스쳤습니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채 10분도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알고 보니 그 듬직한 스파이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소설 쓰는 여자 주인공의 머릿속 상상에 불과한 허상이었습니다. 현실의 요원이라면서 기차 안에 불쑥 나타난 남자는 산발을 한 덥수룩한 아저씨였고, 제가 기대했던 칼 같은 정밀 액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도면 치수 믿고 가공 시작했는데 소재 자체가 뒤틀려 있는 걸 발견했을 때처럼 뒤통수가 얼얼했습니다. 기왕 돈 주고 결제한 거 중간에 끄기도 아까워서 헛웃음을 삼키며 화면을 계속 노려보았습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는 홍보 문구가 떠올랐지만, 실제로 흘러가는 꼴을 보니 이건 치밀한 설계가 아니라 대충 용접질 해놓고 페인트로 덮어버린 불량품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야기 구조의 정밀도만 따지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주인공의 기억이 돌아오는 과정이나 악당들이 우왕좌왕하는 꼴은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엉성하고 어설펐습니다.

 

아가일 본편, 구두 칼날 피겨 스케이팅의 충격

그렇게 투덜거리며 보던 영화가 후반부로 넘어가더니 아예 이성의 끈을 통째로 잘라버렸습니다. 바닥에 쏟아진 기름 위에서 주인공들이 스케이트를 탄답시고 구두 바닥에 칼날을 붙이고 나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칼날로 바닥을 지치며 회전하고 적들의 목을 썰어 넘기는데, 피겨 스케이팅 중계방송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습니다. 보통의 첩보 액션 영화라면 헛기침이 나오고 리모컨으로 당장 꺼버렸을 기가 막힌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뭔가가 탁 하고 풀려버렸습니다. 0.01밀리미터라도 틀어지면 불량품이 나고 돈 수백만 원이 날아가는 현장에서 종일 긴장하고 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영화에서도 완벽한 개연성이나 논리적인 완성도를 따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렇게 대놓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장난질입니다' 하고 뻔뻔하게 밀어붙이니까, 오히려 제 쪽에서 품고 있던 기대를 깨끗하게 내려놓게 되더군요. 기대를 버리고 나니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습니다. 정밀 기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현실에서 한 발짝 벗어나, 그냥 어이가 없어서 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알록달록한 연막탄 사이로 춤을 추듯 총을 쏘고, 기름 바닥에서 트리플 악셀을 뛰는 모양새를 보며 '그래, 너희들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완성도를 엄격하게 따지는 관객에게는 돈 아까운 괴작이겠지만, 찌든 일상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저에게는 이만큼 즉효성이 있는 해열제가 또 없었습니다. 골치 아픈 날 혼자 처방해 먹는 2시간짜리 해열제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해냈습니다. 잘 만든 명작 영화는 보고 나면 가슴에 남는 게 많아서 밤새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이런 황당무계한 B급 감성의 폭탄은 머릿속에 잡생각이 파고들 틈을 전혀 주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작업 스케줄, 자재 입고 지연 걱정, 다음 주 납기 압박 따위가 피겨 스케이팅 칼날에 베여 나가듯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B급 해열제 루틴 — 소림축구·쿵푸허슬 대사까지 외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화면이 어두워질 때쯤 되니, 종일 모니터 화면만 보느라 눈앞에 아른거리던 가공 궤적 잔상들이 싹 지워져 있었습니다. 머릿속의 복잡한 회로가 잠시 멈추고 멍해지면서, 그대로 누우면 아침까지 곯아떨어질 수 있겠다는 나른한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평소에도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하고 일에 치이는 날이면 이런 류의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는 저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주성치 영화인 소림축구나 쿵푸허슬 같은 작품들은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로 수십 번을 돌려봤습니다.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다음 장면에 어떤 뜬금없는 몸개그가 튀어나올지 뻔히 다 알고 있는데도 볼 때마다 머리로 통하는 전선이 탁 끊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상식이나 규격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그 뻔뻔한 에너지를 보고 있으면, 하루 종일 억눌려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립니다. 아가일의 그 정신 나간 연막탄 댄스 총격전도 딱 그런 결이었습니다. 거실에 혼자 앉아 맥주캔을 쥐고 보면서 입을 틀어막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깊은 밤에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냈다가는 안방에서 자고 있는 아내와 내일 학교 가야 할 애들이 깰 게 뻔했습니다. 소리는 밖으로 내지 못하고, 배에 잔뜩 힘을 준 채로 어깨만 위아래로 들썩거리며 끅끅대고 웃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인데도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새벽 1시 귀신 들린 줄 알았잖아 — 아내한테 발각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 불을 다 꺼놓은 거실에는 TV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란 불빛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캔맥주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저는 여전히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그 황당한 화면을 보며 어깨를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소리를 참느라 숨까지 헐떡이며 끅끅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아내가 거실 벽에 기댄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불 꺼진 방에서 남편이라는 작자가 소파를 덜덜 떨며 숨죽여 울듯이 웃고 있으니 얼마나 기괴해 보였겠습니까. 아내는 멍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더니, 진심으로 소름 돋았다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쏘아붙였습니다. "새벽에 불 다 꺼놓고 뭐 해? 귀신 들린 줄 알았잖아." 그 핀잔을 듣는 순간 참았던 웃음보가 더 크게 터질 뻔해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습니다. 잔업하고 와서 피곤하다더니 혼자 거실에서 이러고 있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우스웠습니다. 아내를 서둘러 안방으로 들여보내고 TV 전원을 끈 뒤 방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이불 머리끝까지 쓰고 베개에 얼굴 묻고 끅끅거리다 잠듦의 상태로 금요일 밤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작품성으로 치면 구멍투성이에 헛웃음만 나오는 영화였지만, 적어도 금요일 밤에 찌들어 있던 15년 차 가장의 뇌를 리셋해 주는 데는 더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뭐라 욕하든 제게는 이런 어이없는 B급 영화가 최고의 수면제이자 피로회복제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논리와 정답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날들이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니까요.

 

비록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도면 치수와 가공 공차를 따지며 빡빡한 납기 전쟁터로 출근해야겠지만, 이렇게 한 번씩 머릿속을 시원하게 비워냈으니 또 며칠은 묵묵하게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픈 날이면 저는 앞으로도 군말 없이 이런 엉터리 해열제를 찾아 결제 버튼을 누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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