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 시뻘건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질 않았습니다. 주말 저녁 아이들 재워놓고 혼자 거실 구석에 앉아 캔맥주 하나 비우며 무심코 틀었던 영화였는데, 불 꺼진 화면을 마주하고도 한참 동안 리모컨을 쥐지 못했습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칼 사이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억지로 삼키던 그 고등학생들의 눈빛이 왜 이토록 제 멱살을 잡고 흔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야간 작업 끝내고 돌아와 그저 피로를 털어내려 가볍게 소비하고 넘겼을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체육관 바닥에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그 앳된 얼굴에서, 십수 년 전 쇳가루 자욱한 현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비비던 제 과거가 그대로 겹쳐 보였습니다. 그 투박하고 지독했던 열기가 가슴속 깊은 곳을 세게 치고 지나갔습니다.
리바운드 후기, 15년 차 기술자 심장에 끼얹은 찬물
영화 리바운드는 단 6명의 선수로 전국대회 결승까지 치고 올라갔던 부산 중앙고 농구부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교체 선수 한 명 없이 온몸에 쥐가 나고 발목이 꺾이면서도 코트 바닥을 기어 다니듯 뛰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거친 야생마 같았습니다. 스크린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그 지독한 에너지는 단순히 '감동적인 스포츠 영화'라는 말로 퉁치기에는 제게 너무나 버거운 자극이었습니다. 그들의 헐떡이는 숨소리는 15년 동안 기름밥을 먹으며 무뎌질 대로 무뎌진 제 심장에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단숨에 끼얹는 것 같았습니다. 벤치에 앉아 쉴 틈도 없이 다시 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지금 저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본 적이 언제였나 싶어 뒤통수가 얼얼해졌습니다. 매일 똑같은 공정표를 넘겨받고 소수점 세 자리 공차에 목을 매면서도, 정작 제 속에서는 무언가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어느샌가 마흔 줄에 접어들고 나서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덜 다치고, 어떻게 하면 이 빡빡한 납기 속에서 안전하게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방어적인 계산만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문제가 터지면 적당히 핑계를 찾고, 현장의 위험 부담은 요령껏 피해 가며 내 자리 하나 보전하는 데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영화 속 아이들은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공을 향해 손을 뻗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골대를 빗맞고 튕겨 나온 공을 다시 잡아채는 그 '리바운드'라는 행위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쥐어보려는 자들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패배를 미리 방어하던 제 타성에 묵직한 주먹 하나가 정통으로 날아와 꽂힌 기분이었습니다.
공장 막내 시절, 불 꺼진 공장서 혼자 밤 12시까지
그 아이들의 시뻘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20대 초반 아무것도 모르고 기름 냄새 진동하던 공장 바닥에 처음 발을 디뎠던 제 막내 시절이 문득 끌려 나왔습니다. 스물넷 먹고 현장에 첫 출근을 했던 날, 아침 7시 반이면 덜컹거리는 녹슨 셔터를 가장 먼저 올려야 했습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자마자 탕비실로 뛰어가 믹스커피 대여섯 잔을 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들을 선배들 작업대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는 것이 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선반과 밀링 머신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현장은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조금만 손이 굼뜨거나 치수를 잘못 읽어 멍하니 서 있으면, 등 뒤에서 육두문자가 섞인 고함이 터져 나오거나 스패너 손잡이가 헬멧 뒤통수를 매섭게 쳐들었습니다. 기계 소음에 묻혀 선배의 지시를 한 번이라도 놓치는 날에는 온종일 눈칫밥을 먹어야 했고, 서러움에 화장실 구석에서 몰래 작업복 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날도 수두룩했습니다. 그래도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손재주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기술 하나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남는 시간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 9시나 10시쯤 선배들이 피곤에 절어 하나둘 퇴근 도장을 찍고 나가면, 불이 꺼져 적막해진 공장에 혼자 우두커니 남았습니다. 혼자 형광등 하나를 켜두고 폐자재 통에서 주워 온 쇠토막을 바이스에 물린 채 밤 11시, 12시까지 깎고 또 깎았습니다. 툴마크가 왜 이렇게 거칠게 나오는지, 절삭유를 어떻게 뿌려야 면이 깨끗하게 잡히는지 혼자 이리저리 공구를 갈아 끼우며 씨름했습니다. 귓가에 울리는 기계 회전음과 코를 찌르는 탄 기름 냄새 속에서, 그렇게 보낸 그 수많은 야간의 시간들이 오늘날 제 손끝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백만 원짜리 고철, 반장님이 자기 실수라고 막아낸 날
그렇게 악바리처럼 버텼지만 현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입사 3년 차가 되던 해, 겉멋이 잔뜩 들어 제법 일에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에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꼬박 일주일을 가공해야 하는 기백만 원짜리 특수강 블록을 다루면서, 고속 가공 시 발생하는 열변형 수치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채 엔드밀을 과도하게 밀어 넣었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소재가 비틀렸고, 납기를 코앞에 둔 최고급 강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철 덩어리로 변해버렸습니다. 회사에 엄청난 금전적 손해를 끼쳤다는 공포감과 도망치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 뒤엉켜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간 조도 아니었던 담당 반장님이 연락을 받고 새벽에 헐레벌떡 공장으로 달려오셨습니다. 반장님은 처참하게 망가진 소재와 사색이 된 제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거친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곧장 대표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도면 검토를 잘못해서 지시를 잘못 내린 탓이라며, 온갖 고성과 멸시를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며 제 실수를 막아주셨습니다. 상황을 수습하고 기름때 묻은 장갑을 벗어 던진 반장님이 제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툭 뱉으셨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쇠는 모니터 수치로만 깎는 게 아니야. 쇠도 숨을 쉬는데, 네가 온몸으로 달래가며 깎아야지." 그 한마디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제 오만함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선배들이 깎아낸 쇳가루 칩의 색깔만 보고도 현재 가공 온도가 적정한지 가늠해 내는 그 동물적인 감각까지 모조리 훔쳐 배우려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녔습니다.
손끝이면 밥 안 굶는다, 그 반장님 지금은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 제 손끝이 제법 야물어졌을 무렵, 반장님과 함께 동네 허름한 삼겹살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날이 있었습니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제 앞접시에 툭 던져주시며 반장님이 무심하게 한마디를 건네셨습니다. "이제 네 손끝 기술이면 어디 가도 처자식 밥은 안 굶기겠다." 그 투박한 인정 한마디에 그동안 참고 견뎌왔던 설움과 긴장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삼겹살 불판 앞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산처럼 거대해 보였고 평생 현장을 지킬 것 같던 그 반장님도 환갑을 넘기시더니 고장 난 기계처럼 무릎과 허리가 완전히 주저앉으셨습니다. 평생 서서 쇠를 깎아내던 대가로 몸의 연골이 다 닳아버려 결국 몇 해 전 현장을 떠나셨고, 지금은 전라남도 시골 구석의 작은 텃밭을 일구며 지내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도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수화기 너머로 거칠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손가락 조심해라. 애들 한창 클 때인데 네가 다치면 식구들 다 고생이다." 통화를 끊고 나니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게 조여왔습니다. 그 시절 거인 같던 베테랑 기술자들도 세월 앞에서는 낡은 기계처럼 닳아 물러나고, 이제는 그들이 서 있던 그 무겁고 서늘한 빈자리를 제가 오롯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어깨를 누르는 납기와 매달 나가는 생활비 계산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도 많지만, 내일 아침에도 저는 작업화 끈을 조여 매고 기름 냄새 나는 기계 앞으로 갈 것입니다. 코트 위를 악착같이 구르던 그 녀석들처럼,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지금 제가 가족과 일터에 건넬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