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영관 불이 켜졌을 때 뭉근한 온기가 남아 기분 좋은 멍함을 즐겼습니다. 피곤에 절어 들어갔던 극장에서 만난 영화 '도그데이즈'는 생각보다 훨씬 잔잔한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하루 종일 모니터 화면 속 3D 모델링 선을 들여다보며 100분의 1밀리미터 치수와 씨름하다 보면 눈알이 뻑뻑해지곤 합니다. 가공 프로그램 좌표 하나만 빗나가도 멀쩡한 쇠토막이 순식간에 불량이 나버리니,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합니다. 기름때 묻히며 현장 바닥을 뒹굴던 20대 때나 공정 잡고 머리 싸매는 지금이나, 납기 압박과 긴장감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런 날에는 퇴근길에 억지 감동을 쥐어짜는 이야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긴장이 풀리는 무언가가 간절해집니다.
도그데이즈, 신파 아닌데 신파로 오해받는 영화
처음에는 반려견 영화라고 해서 뻔한 최루성 신파가 아닐까 지레 겁을 먹고 피하려 했습니다. 대개 이런 영화들은 후반부에 짐승 하나 아프게 만들어서 관객들 눈물 콧물 쏙 빼놓는 전개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과만으로도 감정 소모가 극심한 현장 기술자 입장에서, 굳이 돈 내고 들어가 억지 슬픔을 뒤집어쓸 이유는 없었습니다. 주변 동료들도 강아지 영화라고 하면 으레 휴지 챙겨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손사래를 치곤 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이 영화는 그런 식의 얕은 감정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도그데이즈에서 강아지들은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장치가 아니라, 서로 서먹하고 각진 사람들이 손을 맞잡게 해주는 핑계이자 징검다리일 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쌀쌀맞아 보이지만 속정 깊은 건축가, 집주인과 세입자,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인간들이 네 발 달린 녀석들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엮여 들어갑니다. 가공 현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성격 까다로운 작업자와 설계자 사이에 딱 맞는 가공 치수나 잘 나온 치공구 하나가 들어가면 불필요한 마찰이 싹 사라집니다. 솔직히 현장에서는 도면대로 안 나와서 얼굴 붉히고 골치 아픈 날이 태반인데, 영화를 보다 보니 그 껄끄러운 인간관계 틈새를 짐승 하나가 기름칠하듯 부드럽게 메워주는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카메라가 동물의 애처로운 눈망울만 집요하게 쫓아가지 않아서 보는 내내 숨통이 트였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비극으로 감정을 쥐어짜기보다는,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신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지나치기에는 담백하고 고른 결을 가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에서 나오며, 기분 좋은 멍함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상영관 조명이 서서히 밝아졌을 때, 뭉근한 온기가 남아 한동안 기분 좋은 멍함을 즐겼습니다. 빡빡한 가공 공정 사이클이 무사히 끝나고 기계 부저가 울릴 때 찾아오는 그 특유의 안도감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 근육이 조금은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극장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자 쌀쌀한 밤공기가 훅 끼쳐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주차장으로 곧장 발걸음을 재촉했을 텐데, 그날은 횡단보도 앞을 지나가는 길거리 강아지들과 견주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목줄을 잡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영화 속 인물들처럼 유난히 평온해 보였습니다. 매일 쇠 깎는 소리와 절삭유 냄새 속에서 기계적인 수치만 따지며 살다 보니, 이렇게 길 위에서 마주치는 생명체들의 온기를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짐승을 바라보며 저토록 편안한 얼굴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시선을 끌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라디오를 켜지 않고 조용히 운전대만 잡았습니다. 귓가를 맴돌던 기계 소음 대신 묵직하고 잔잔한 감정이 그 자리를 채워주었습니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한결 가벼웠습니다.
두 번째 관람, 집안 공기가 순해지던 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 저녁에 거실 TV로 이 영화를 다시 틀었습니다. 집에서 틀어만 놔도 집안 공기 자체가 순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볼 때는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보다는,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배경음악처럼 곁에 두는 맛으로 슬렁슬렁 보았습니다. 편안한 영상과 소리가 거실에 잔잔하게 깔리는 것만으로도 주말의 피로가 씻겨나가는 듯했습니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갈 무렵, 나란히 앉아 보던 아이들이 대뜸 강아지를 키우자고 합창을 시작했습니다. 마당 있는 주택도 아니고 좁은 아파트에서, 그것도 맞벌이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개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알기에 한동안 진땀을 뺐습니다. 밥 주고 똥 치우는 일은 결국 부모 몫이 될 게 뻔히 보였습니다. 달래고 타이르며 시선을 돌리려는데, 옆에 앉은 아내가 슬그머니 휴지를 뽑아 눈가를 꾹꾹 누르는 게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애들 성화에 난감한 척하면서도, 화면 속 인물들이 마음을 열어가는 장면에 아내 역시 마음이 움직였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철없는 조르기와 아내의 붉어진 눈시울, 그리고 TV에서 흘러나오는 온화한 대사들이 한데 뒤섞였습니다. 온 식구가 같이 웃고 코를 훌쩍이며, 건조했던 거실에 사람 온기가 빈틈없이 꽉 들어찬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계 도면을 볼 때는 느낄 수 없는,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든든한 안정감이었습니다.
강아지 대신 온 크레스티드 게코
결국 강아지는 끝까지 키우지 못했습니다. 털 날림이나 층간소음, 그리고 낮 시간 동안 텅 빌 집안을 생각하면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대신 긴 고민과 상의 끝에 작은 도마뱀인 크레스티드 게코를 식구로 들였습니다. 개처럼 품에 안고 뒹굴 수는 없어도, 맑은 사육장 유리 너머로 동그란 눈을 맞추고 있으면 집안에 작고 여린 생명의 온기가 도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현관문 열고 들어와 가방부터 팽개치고는 제일 먼저 사육장 앞으로 달려갑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기만 들여다보던 녀석들이 작은 생명체가 움직이는 모습에 정신을 쏙 빼앗기곤 합니다. 밥을 줄 때가 되면 서로 자기가 주겠다고 투닥거리며 귀여운 신경전을 벌입니다. 주사기 끝에 묻은 사료를 녀석이 혓바닥으로 핥아먹기 시작하면, 두 녀석 모두 숨을 멈추고 사육장 안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손에 열이 많으면 녀석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설명을 어디서 찾아 읽었는지,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찬물로 손을 깨끗이 씻고 나와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 고사리 같은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까지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데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쇠를 깎아 만드는 일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차가운 세계이지만, 퇴근 후 문을 열었을 때 온기를 품은 작은 생명과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거친 현장을 버티게 해줍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출근해 가공 납기를 맞추려 기계 앞에 서야겠지만, 식구들이 남겨준 온기 덕분에 또 하루를 묵묵히 버텨낼 힘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