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 리모컨을 잡고 별생각 없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재판장에서 이정재 배우가 상의를 훌렁 벗어 던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딱 멈췄다. 화면 속 염석진은 가슴과 팔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총탄 자국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내 몸에 총알이 두 개나 박혀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린 나를 어떻게 의심할 수 있습니까!" 하고 소리치는데, 그 눈빛과 목소리의 떨림이 너무 강렬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화면에 빠져들었다. 사실 그날 저녁에는 잠깐 뉴스나 보고 일찍 자려고 했는데, 우연히 마주친 그 한 장면의 몰입감이 어찌나 무섭던지 결국 리모컨을 내려놓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밤늦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영화 <암살>은 그렇게 아주 우연한 기회로 내 일상의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왔다.
채널을 돌리다 나를 멈춰 세운 그날의 잔상
평소에 영화를 찾아볼 때도 친일파나 독립운동을 다룬 역사물은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져서 조금 피하는 편이었다. 왠지 모르게 보고 나면 마음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밤, 채널을 돌리다 멈춘 영화 <암살>의 재판장 장면은 단순한 역사극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아주 밑바닥에 있는 뻔뻔함과 생존 본능을 그대로 껍질 벗겨 보여주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염석진이라는 인물은 한때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이지만, 일제의 악랄한 고문과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동지들을 팔아넘기는 밀정이 된 인물이다. 그가 세월이 흘러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파산 재판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피해자이자 영웅으로 포장하며 울부짖는 모습은 보는 내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분명히 영화 속 연기라는 걸 알고 보는데도, 저 사람이 지금 저 자리에서 저렇게 소리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진짜 독립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까 싶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딴짓을 하려던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대체 저 사람이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저 뻔뻔함의 끝은 어디일지 확인하고 싶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정재의 연기, 3초 동안 진짜 억울한 줄 착각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를 가장 경악하게 만든 건 단연 염석진 역을 맡은 이정재 배우의 미친 듯한 연기력이었다. 재판장에서 "내 몸에 총알이 두 개나 남아 있습니다!" 하면서 옷을 찢어 발기고 상처를 보여줄 때는, 거짓말 안 하고 딱 3초 동안 '어? 저 사람이 진짜 억울한 독립운동가였나?' 하고 순간적으로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저렇게까지 스스로를 속이고 남까지 완벽하게 속일 수 있구나 싶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더라고요. 염석진은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동지들의 죽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해방된 세상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patriot, 즉 애국자 행세를 한다. 그 눈빛에는 죄책감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독한 욕망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생존이라는 핑계 뒤에 숨었을 때 어디까지 비열해질 수 있는지 눈으로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그 뻔뻔한 연기에 얼이 빠져서 넋을 놓고 봤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열함이 너무 생생하게 와닿아서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대사가 남긴 깊은 가슴앓이
영화 후반부, 마침내 안옥윤과 명우가 염석진을 추적해 단죄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염석진이 왜 동지들을 팔아넘겼냐는 질문에 던진 대사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며 나를 괴롭힌다.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았으면 그랬겠나!" 이 한 마디를 툭 내뱉는데, 가슴 속에서 화가 팍 치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지독하게 씁쓸하고 묵직해졌다. '해방이 안 될 것 같았으니까'라는 그 구차한 변명이, 당시에 타협하고 친일을 선택했던 자들의 진짜 속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군들은 해방될 것을 확신해서 목숨을 바쳤겠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옳은 길이라고 믿었기에 피를 흘렸던 것인데, 자기는 정세 판단을 잘해서 살아남은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그 attitude가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처음에는 그냥 배신자에 대한 분노와 화만 가득 차올랐는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마지막에 남은 건 비통함과 씁쓸함뿐이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과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암살>은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아니었다.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처럼 자신들의 이름조차 역사에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일제의 총탄에 스러져간 독립투사들의 삶과, 그 반대편에서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변절해 호의호식한 자들의 삶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안옥윤이 "독립이 되면 알려줘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고 말했던 장면이 염석진의 변명과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리는 이미 역사의 결과를 알고 보는 관객이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 절망의 순간에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고, 누군가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동지를 밀고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만약 내가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과연 안옥윤처럼 싸울 수 있었을까, 아니면 염석진처럼 타협했을까'라는 두려운 질문이 스스로에게 계속 밀려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묵직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끝까지 견딘 사람들의 피 눈물 위에, 타협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웃는 게 너무 불공평해서요.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멈춰 선 그 밤, 나는 잊고 지냈던 역사 속 무명 영웅들의 무게를 아주 무겁게 가슴에 담게 되었다. 앞으로는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가 다시 나오더라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멈춰 서서 화면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