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 문을 나서자마자 나와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근처 포장마차로 직행했다. 영화관 안에서 가슴 졸이며 느꼈던 그 강렬한 여운과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 터질 듯한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 집으로 곧장 들어가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주황색 천막 안으로 들어서서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는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헵시바, 아니 전지현이라는 배우 한 사람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줄줄이 등장하는 국내외 내로라하는 명품 배우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던 예니콜의 거침없는 줄타기 액션과 특유의 능청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대사들은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계속 내 귓가에 맴돌았다. 시원하면서도 쌉싸름한 밤공기를 맞으며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담긴 따끈한 국물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자니, 마치 우리 자신도 마카오 박이 정교하게 짜놓은 판 안에서 방금 막 걸어 나온 도둑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묘하고도 착각마저 들었다. 젊은 날 우리가 공유했던 뜨거운 열기와 영화가 선사한 강렬한 자극이 한데 섞여,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 밤의 포장마차 공기는 수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빛바래지 않은 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20대의 첫 관람,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과 쏟아낸 전지현 이야기
영화가 끝나고 찾아간 포장마차에서 우리는 주문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기본 안주가 다 식어가는지도 모른 채, 오직 전지현이라는 배우가 보여준 압도적인 잔상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빌딩 벽면을 와이어 하나에 의지한 채 가볍게 넘나들며 시원하게 날려대던 그 도도하고도 명랑한 표정은, 정말 같은 여자가 봐도 혹은 남자가 봐도 반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한참 동안 신이 나서 술기운이 살짝 오르자, 나는 영화 속 예니콜의 명대사인 "당신이 나를 몰라~ 당신이 나를 몰라서 그래~" 하고 콧소리를 섞어가며 어설프게 따라 해보았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짓궂은 욕과 핀잔을 바가지로 쏟아냈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포장마차가 떠나가라 껄껄 웃어댔다. 따끈하고 구수한 우동 한 그릇에 각자 소주 한 병씩을 비워내며 영화 속 명장면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분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뜨겁게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를 떨었지만, 서로 내일 출근해야 하는 일상이 있고 지켜야 할 일과가 있었기에 딱 밤 10시가 되자마자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참 순수했고, 영화 한 편에도 온 세상을 얻은 듯 유쾌하고 열정적이었다.
그저 화려하고 가벼운 오락 영화? 오해하기 딱 좋은 겉모습
사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케이퍼 무비 특유의 가볍고 화려한 액션 오락 영화라고만 생각하기 쉬웠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속도감 넘치는 전개, 톡톡 튀는 명품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찰진 티키타카 대사,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의 판타지 같은 밤경치가 순식간에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음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누가 누구를 속이고 속이는지, 그 엄청난 가치의 다이아몬드를 도대체 어떤 신기한 기법으로 훔쳐 달아나는지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사건과 액션 카타르시스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겼었다. 머리를 복잡하게 쓸 필요 없이 그저 화면에 나타나는 볼거리에 감탄하고 빵빵 터지는 웃음을 즐기면 그만인, 한국 상업 영화의 최고 봉우리에 있는 작품이라고만 단정 지어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겉으로 보이는 매끈하고 가벼운 포장지 밑에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복잡한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과 배신, 그리고 결코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라는 진한 감정의 앙금이 묵직하게 숨겨져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애들 재우고 혼자 다시 본 도둑들, 눈빛과 감정선이 먼저 들어왔다
세월이 한참 지나 나도 어느덧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재운 뒤 집안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온 깊은 밤이었다. 나는 혼자 거실 불을 끄고 조용히 OTT를 켜서 이 영화를 다시 재생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20대 시절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배를 잡고 웃으며 이야기하던 그 화려한 볼거리와 액션들은 뒤로 스르륵 물러나고, 대신 화면 속 배우들의 숨겨진 깊은 눈빛과 미세하게 떨리는 감정선이 내 가슴 깊은 곳으로 먼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젊었을 적 철없던 시절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 각자의 쓸쓸함과 슬픔이 비로소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마카오 박이라는 인물이 과거 자신을 짓눌렀던 치명적인 배신과 상처를 가슴속 깊이 품은 채, 그 누구도 감히 믿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그 거대한 복수의 판을 하나하나 짜나갈 때 느꼈을 극심한 고독과 중압감이 어마어마한 무게로 나에게 다가왔다. 타인을 끊임없이 속이고 또 속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도둑들의 세계에서, 그가 홀로 짊어졌던 마음의 짐과 외로움이 얼마나 깊고 차가웠을지 비로소 기성세대가 된 나로서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금고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쥐는 순간, 기쁨은 없고 씁쓸함과 허탈함만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순간, 마카오 박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고 인생을 걸었던 거대한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마침내 철통같은 금고 안에서 자신의 손에 쥐게 된다. 20대 때 극장에서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그저 치밀한 작전이 성공한 승자의 통쾌한 쾌감과 짜릿함으로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조금씩 알아간 뒤 다시 본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목숨을 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승리의 환희나 기쁨의 빛도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오직 지나온 세월에 대한 진한 씁쓸함,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루었으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가슴 뚫린 허탈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손에 쥔 보석은 눈부시게 빛나며 세상의 부를 약속하는 듯했으나, 정작 그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와 소중한 사람들과의 신뢰를 내던져야 했던 한 사람의 속은 이미 까맣게 타버린 뒤였던 것이다.
영롱하고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을 손에 쥐고서도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텅 빈 눈을 하고 있던 마카오 박의 그 표정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뒤에도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네 인생에서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껍데기나 간절히 원해서 손에 쥐게 된 물질적인 것들이 과연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행복하게 해주는가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손에 쥔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한 것은 어쩌면 그 시절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들과의 온기였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옛날 20대 시절의 그 뜨거웠던 추억도 살릴 겸, 그날 포장마차에서 안주도 안 먹고 전지현 이야기만 밤새도록 늘어놓았던 옛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돌려봐야겠다. 그리고 조촐한 동네 포장마차에 모여 앉아 따끈한 우동 한 그릇에 털털하게 소주 한 잔 기울이자고 조용히 말을 건네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