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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레이징 그레이스, 새벽 두 아이 발을 쥐며 굳힌 다짐

by 풍성함 2026. 10. 12.

레이징 그레이스 영화 공식 포스터

지 목숨보다 귀한 새끼를 담아 다니는구나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그날 밤 저는 홀린 사람처럼 영화 레이징 그레이스를 끝까지 봤습니다. 공장 문 닫고 들어온 시각이 밤 열한 시 반이었습니다. 주말 특근까지 뛰고 들어온 몸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무거웠고, 손톱 밑에 박힌 절삭유 기름때는 비누로 세 번을 문질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불 꺼진 거실에 털썩 주저앉아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 꺼내 들었습니다. CAM 프로그램 짠다고 종일 듀얼 모니터 화면의 공구 경로만 노려봤더니 눈알이 모래를 뿌린 것처럼 뻑뻑했습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기계 쇳소리를 좀 씻어내려고 아무 생각 없이 OTT 화면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깎아내야 할 금형 부품의 납기일은 늘 칼날처럼 다가옵니다. 납기를 못 맞추면 거래처 담당자의 거친 언성이 날아오고, 가공 치수 하나만 삐끗해도 몇백만 원짜리 소재를 통째로 날려 먹는 긴장감 속에 삽니다. 그런 날은 퇴근을 해도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습니다. 그냥 멍하니 머리를 비울 요량으로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누르고 있었습니다.

 

레이징 그레이스, 킬링타임용으로 틀었다가

포스터 하나가 눈에 걸렸습니다.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 노동자 엄마와 어린 딸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머리나 식힐 겸 가볍게 눌렀던 손가락이 채 10분도 안 되어 굳어버렸습니다. 주인공 조이가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 안에 자기 딸을 웅크려 넣고 지퍼를 잠그는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남의 집 청소를 하러 다니며 들키지 않으려고, 자기 몸통만 한 가방에 아이를 숨겨서 끌고 다녔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들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서 허리를 바짝 세워 앉았습니다. 화면 속 가방 바퀴가 보도블록 틈새를 덜컹거리며 지날 때마다 제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었습니다. 지 목숨보다 귀한 새끼를 저 좁은 통 속에 구겨 넣고 끌고 다녀야 하는 저 여자의 속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 싶었습니다. 공차 100분의 1밀리미터 맞추느라 버니어 캘리퍼스 쥐고 손을 떨던 제 하루의 피로 따위는 단숨에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조이가 아이를 숨긴 캐리어를 끌고 들어간 곳은 런던의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집이었지만, 공기가 썩어가는 듯한 음산한 기운이 화면을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아픈 노인을 간병하고 청소를 도맡는 조건으로 방 한 칸과 돈을 얻게 되자, 조이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안도하는 얼굴을 보는데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저택 구석구석에 도사린 불길한 징조 따위는 눈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당장 내 새끼 길바닥에 나앉지 않고 비바람 피할 지붕이 생겼다는 사실 하나에, 부모는 제 목숨도 영혼도 다 내어놓게 됩니다. 영화는 귀신이 나오고 피가 튀는 호러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제 눈에는 그저 벼랑 끝에 몰린 부모의 처절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였습니다. 기계는 입력한 좌표값대로 정직하게 깎여 나갑니다. 치수가 어긋나면 보정값을 먹이고 공구를 교체해 다시 돌리면 그만입니다. 사람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속 조이에게는 물러설 오차 범위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비자도 없고 기댈 곳도 없는 타국에서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생기면 아이와 생이별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화면 속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제 멱살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맥주 탄산 다 빠지도록 손 못 댄 영화

처음 캔을 딸 때 들이켰던 시원한 첫 모금을 끝으로, 맥주캔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굳어 있었습니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고 저택 주인의 기괴한 실체와 뒤틀린 악의가 드러나는 동안에도 손을 댈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알코올 기운은 영화 시작 삼십 분 만에 식은땀과 함께 다 달아났습니다. 기계실에서 15년을 구르며 온갖 풍파를 겪었습니다. 손가락이 롤러에 끼어 잘려 나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고, 고속 가공 중에 튄 쇳가루가 눈에 박혀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었습니다. 경기가 바닥을 칠 때는 한 달 내내 야근 수당도 안 나오는 잔업을 붙들고 버텼습니다. 윗사람의 멸시와 거래처의 무리한 단가 후려치기 앞에서도 속엣말을 꿀꺽 삼키며 허리를 숙였습니다. 내 자존심보다 내 새끼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가락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조이가 감내하는 수모와 공포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택의 주인이 던지는 모욕적인 시선,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딸아이 앞에서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제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매달 날아오는 대출 이자 고지서와 아이들 학원비 명세서를 볼 때마다 숨이 턱에 닿는 우리네 평범한 가장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의 검은 화면 위로 흰 글자들이 무심하게 올라갈 때야 테이블 위 캔을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탄산은 이미 흔적도 없이 다 빠져나갔고,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액체는 입술을 적시는 순간 쇠 녹물 같은 맛이 났습니다. 취기는커녕 속 깊은 곳에 얼어붙은 차가운 돌덩이 하나가 묵직하게 얹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일터에서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으면 이 집안 전체가 흔들린다는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기계는 고장 나면 부품을 갈아 끼우면 되지만, 한 가정의 울타리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영화는 그 현실적인 공포를 사정없이 후벼 파고 있었습니다.

 

새벽 2시 반, 기름때 손으로 아이 발을 쥐다

식어버린 맥주를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수돗물을 틀어 거품을 씻어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벽시계 바늘이 새벽 2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실 불을 끈 채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안방을 지나 아이들 방 문을 살며시 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고르게 들려오는 두 녀석의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큰놈과 2학년 작은 녀석이 이불을 반쯤 걷어찬 채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녀석들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절삭유 냄새가 아직 덜 빠진 거친 손으로 작은 아이의 발을 가만히 감싸 쥐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손끝에 닿는 아이의 발은 유독 작고 여려 보였습니다. 이 녀석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걸 보며 흐뭇해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세상의 거친 풍파로부터 내가 언제까지 이 온기를 막아줄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납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이 작은 방 한 칸의 울타리에 금이 가는 순간, 내 새끼들도 영화 속 그 비좁은 캐리어 안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서늘한 자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힘없는 사람의 눈물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공장의 가공 스핀들처럼 단 1미크론의 자비도 없이 냉정하게 돌아갈 뿐입니다. 기술을 배우겠다고 기름 바가지 뒤집어쓰며 현장 바닥을 기던 20대 막내 시절에는 내 한 몸만 건사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지금은 제 등 뒤에 목숨보다 무거운 두 녀석의 미래가 얹혀 있습니다. 새벽 2시 반에 아이 발을 쥐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쇳밥을 먹든 자존심을 바닥에 내팽개치든, 너희들 발 뻗고 잘 이 방만큼은 기필코 지켜내야겠습니다.

 

두세 시간 뒤면 또다시 머리맡에서 요란하게 알람이 울릴 것입니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묵직한 안전화 끈을 동여매야 합니다. 공장으로 출근해 쇳가루 날리는 공기 속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밀링 툴을 돌리고 도면을 맞출 것입니다. 이 작은 발들이 내일도 따뜻한 방에서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만 있다면, 공장 바닥의 어떤 기름때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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