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극장 한구석에 앉았다.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과 끝없는 피로 속에서 몸과 마음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 바닥나 있었고, 누구와 사소한 대화를 나눌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아 퇴근길에 홀로 어두운 상영관으로 숨어들었다.
빅토리 후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들어간 극장
영화의 줄거리는 초등학생 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명쾌하고 시원하게 흘러간다. 1999년 세기말, 춤에 살고 춤에 죽는 거제의 당찬 여고생 필선과 미나가 오직 마음껏 춤출 수 있는 연습 공간을 얻겠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에서 전학 온 치어리더 세현을 영입해 초짜 치어리딩 동아리 '밀레니엄 걸즈'를 만들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무렵 내 현실은 잿빛 그 자체였다. 아침에 무거운 눈을 떠서 일터로 나가고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하루하루가 끝없이 이어지다 보니, 문득 '내가 지금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걸까' 하는 깊은 무기력함이 턱밑까지 가득 차올라 숨이 막혔다. 나 자신을 위한 열정이나 가슴 뛰는 설렘 같은 건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그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하루를 버텨내던 시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극장 한구석에 앉았다. 팝콘 하나 살 여유도 없이 편의점에서 산 차가운 캔커피 하나를 손에 쥐고 맨 뒷줄 구석 자리에 조용히 몸을 파묻었다. 상영관의 불이 서서히 꺼지고 완전한 암전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 세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은 것 같은 깊은 안도감이 밀려오며 조용히 스크린을 올려다보았다.
여고생 댄스 영화? 외환위기 거제도가 깔려 있다
'빅토리'라는 제목과 발랄한 포스터만 슬쩍 보고 "다 큰 어른이 무슨 여고생들이 나와서 치어리딩하는 영화를 보냐"며 유치한 복고풍 학원물로 단정 짓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결코 가벼운 댄스 영화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발랄한 응원 뒤편에는 1999년 외환위기 직후, 조선소가 흔들리고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어닥쳐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 묵묵히 버텨내야 했던 거제도 부모들의 거칠고 팍팍한 삶의 그늘이 묵직하게 깔려 있다. 영화 속 필선의 아버지를 비롯한 거제의 어른들은 거친 바닷바람과 쇳가루 날리는 일터에서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막막함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그런 팍팍한 도시 한가운데에서 1999년의 푸른 거제 바다를 배경으로 듀스, 김원준, 디바 같은 신나는 90년대 댄스 명곡들이 쿵쾅거리며 터져 나오는 순간 내 굳어있던 심장도 덩달아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밀레니엄 걸즈 아이들은 남을 짓밟고 이기기 위한 승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만년 꼴찌에 익숙해진 축구부부터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조선소의 부모님들, 그리고 결국에는 버거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모두를 향해 "스스로를 온 힘을 다해 응원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주고 있었다.
스탠드업, 흙바닥에서 캔커피 쥔 손에 힘이 꽉
영화 속에서 내 가슴을 가장 뜨겁게 흔들었던 장면은 매번 지기만 해서 패배에 익숙해진 거제상고 축구부 운동장 씬이었다. 화려한 무대도 아니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거친 흙바닥 위에서,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들이 반짝이 수술을 흔들며 목청껏 "스탠드 업(Stand Up)!"을 외치며 치어리딩을 펼칠 때였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그 투박한 흙바닥에서 아이들이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제발 다시 일어나라고 온몸을 던져 소리치는 순간, 캔커피를 쥐고 있던 내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꽉 들어갔다. 그러면서 차갑게 식어있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타인을 향한 순수한 응원이 스크린을 뚫고 전해지며 오랫동안 꺼져 있던 내 마음속 불씨가 다시 확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와 차에 타자마자 평소엔 잘 듣지도 않던 듀스의 '나를 돌아봐'와 김원준의 'Show'를 플레이리스트에서 찾아 볼륨을 최대로 올리고 차창을 활짝 내렸다.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운전대를 두드리는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피로가 시원하게 날아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밤에 미뤄두고 한숨만 쉬던 골치 아픈 일거리들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단숨에 해치워버렸다.
밤에 미뤄둔 일거리 콧노래 흥얼거리며 단숨에 해치웠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쳐 스스로를 다독일 여유조차 잃어버린 모든 어른들에게, 이 영화는 잊고 지냈던 가슴속 불씨를 다시 지펴주는 가장 뜨겁고 순수한 영양제 같은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씩씩하게 다시 일어설 작은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이 투박한 응원에 온몸을 맡겨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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