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역에 울려 퍼진 서늘한 총성에 와이프는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을 스르륵 내려놓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말 밤, 아이들을 씻겨 방에 재우고 주방 뒷정리까지 마친 뒤 거실 불을 싹 껐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 두 개를 꺼내와 자리에 앉으니 밤 10시 40분이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 부부는 숨소리조차 조심해가며 화면 속 매서운 칼바람에 빠져들었다. 1909년, 차가운 설원을 뚫고 오직 조국의 독립을 향해 목숨을 내걸었던 안중근 의사와 독립투사들의 숨 막히는 거사 여정이 거실의 어둠을 집어삼켰고, 마침내 방아쇠가 당겨지던 그 강렬한 순간 우리는 마시던 맥주조차 잊은 채 숨죽여 화면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시린 설원과 멈추지 않는 결의, 하얼빈으로 향한 발걸음
영화 [하얼빈]의 줄거리는 초등학생 아이도 한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목표가 뚜렷하고 묵직하다.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1909년, 빼앗긴 들판을 되찾고 백성들의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모인 대한의군 참모중장과 독립투사들의 실제 역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안중근과 동지들은 영하 수십 도의 살을 에는 듯한 만주의 눈보라를 뚫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추적을 피해 오직 일본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하얼빈역으로 향한다. 영화는 단순히 영웅 한 명의 화려한 무용담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살을 에는 듯한 설원 위에서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와 배신의 그림자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맞잡고 묵묵히 걸어가는 독립군들의 고독과 두려움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준다. 거사를 앞두고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우리가 멈추면 대한의 내일도 멈춘다"는 마음으로 총구를 닦던 인물들의 떨리는 손끝을 보며, 거실 소파에 앉아 따뜻하게 맥주를 홀짝이던 내 손이 부끄러워질 만큼 깊은 몰입감과 긴장감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불 켜자마자 보인 것, 평소엔 안 우는 사람이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의 음악이 흘러나올 때 거실 불을 탁 켰다. 불 켜자마자 보인 것은 소매 끝으로 눈가를 연신 훔치고 있는 와이프의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눈물 한번 잘 보이지 않던 사람인데,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한참 동안 코를 훌쩍였다. 와이프는 떨리는 목소리로 "안중근 의사도 대단하지만,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그 차가운 땅바닥에서 목숨 바친 수많은 동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겠지"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 한마디가 가슴을 쿵 하고 치면서 내 마음 한구석도 한없이 묵직해졌다. 우리는 불을 켜고 나서도 30~40분 동안 거실 소파에서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빈 맥주 캔만 매만지며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나라면, 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그 순간에 처자식을 두고 차가운 눈밭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을까. 내 가족의 안위보다 조국의 내일을 먼저 생각하며 기꺼이 목숨을 던진다는 것이 얼마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숭고한 희생인지 곱씹을수록 먹먹한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새벽 1시 반, 애들 방 들여다보고 든 생각
거실 정리를 마치고 새벽 1시 반이 넘어서야 애들 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방 안에서는 아이들이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땀에 젖은 아이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넘겨 주고, 발로 뻥 차낸 이불을 발끝까지 정성스레 다시 덮어주었다. 그 순간 영화 속 차가운 설원을 달리던 수많은 독립투사들도 결국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었고, 또 집에서 아이를 품에 안아주던 평범한 아빠였을 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분들이 그 지독한 추위와 고통을 버텨낸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의 뒤를 이어 살아갈 아이들에게는 총칼과 설움이 없는 평화로운 땅을 물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부정(父情)이자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내 아이들이 아무런 불안 없이 따뜻한 방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이 평온한 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고귀한 목숨과 맞바꿔 지켜낸 기적이라는 사실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비비며 "아빠!" 하고 우르르 뛰어나오는 아이들에게 평소 같았으면 "뛰지 마" 하고 잔소리부터 쏟아냈겠지만, 그날은 그저 말없이 씩 웃으며 품 안에 꼭 안아주었다.
만주 칼바람과 시끌벅적한 식탁이 겹쳐지며 이게 그분들이 지키려 한 내일이구나 싶었다. 아침 햇살 아래 따뜻한 밥을 함께 먹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거실에 가득 차는 이 소박한 순간을 지키기 위해, 가장으로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매일의 일상을 소중히 살아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