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취해 필름 끊긴 채 아침에 폰 확인할 때의 공포와 지질함이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그 낯부끄럽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극장 스크린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 영화가 바로 김래원, 공효진 주연의 <가장 보통의 연애>였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상영관 문을 나서는데도, 남의 연애를 구경한 게 아니라 묻어두었던 내 20대의 가장 지질한 밑바닥을 강제로 들춰보고 나온 것 같아서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려 혼이 났다.
1. 가장 보통의 연애, 아침에 폰 확인할 때의 공포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의 이야기는 초등학생도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결혼을 앞두고 파혼당해 매일 밤 술로 슬픔을 달래며 전 약혼녀에게 매달리는 지질한 남자 '재훈'과, 바람피운 전 남친과 깔끔하게 끝내고 새 직장으로 이직했지만 여전히 뒷담화와 상처에 시달리는 현실적인 여자 '선영'이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만나 티격태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환상이나 멋들어진 대사 따위는 전혀 없다. 사랑이 끝난 뒤에 남겨진 인간의 유치하고 구차한 민낯을 날것 그대로 화면에 쏟아낸다. 특히 전 애인에게 밤새 '자니?', '뭐해?' 같은 카톡을 수십 번씩 보내고, 심지어 새로 온 직장 동료인 선영과 무려 2시간 넘게 술주정 통화를 해놓고는 다음 날 아침에 눈떠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재훈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깨질 듯한 두통을 부여잡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통화 목록과 메신저 창을 확인하며 경악하는 그 표정을 보는데, 스크린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 민망함은 나 혼자만의 몫이 아니었는지, 어두컴컴한 극장 안 여기저기서 관객들이 탄식 섞인 헛웃음을 빵빵 터뜨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2. 여사친이랑 봤더니 반응이 달랐다
이 영화를 볼 때 더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던 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행 때문이었다. 어설프게 분위기 잡는 썸녀와 보러 갔다면 숨이 턱 막혀서 팝콘은커녕 콜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넘겼을 텐데, 10년 넘게 서로의 연애 흑역사를 속속들이 다 알고 지낸 털털한 여사친과 둘이 보러 갔던 것이다. 재훈이 술에 떡이 되어 벽에 머리를 박고 헛소리를 쏟아내거나, 스마트폰을 붙잡고 구질구질하게 늘어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옆자리에서 사달이 났다. 여사친이 아주 신이 났다는 듯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야, 딱 네 얘기 아니냐? 정신 좀 차려라, 진짜" 하고 귓속말로 얄밉게 비웃음을 날려댔다. 너무 뼈를 세게 맞아서 속이 뜨끔하고 찔리면서도, 그 상황이 또 어이가 없고 웃겨서 둘이 팝콘 통을 가운데 두고 입을 틀어막은 채 큭큭거리며 영화를 봤다. 남들의 그럴듯한 사랑 이야기였다면 그냥 팔짱 끼고 구경했겠지만, 우리 둘 다 지나온 청춘의 어딘가에서 한 번쯤 겪어봤던 씁쓸한 밑바닥이었기에 그 웃음 뒤에는 묘한 연대감과 공감이 섞여 있었다.
3. 내 흑역사를 강제로 소환당한 기분
여사친의 장난 섞인 핀잔에 웃어넘기면서도 내 심장이 유독 세게 쿵쾅거렸던 건, 실제로 20대 시절에 겪었던 지독한 이별의 악몽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가슴앓이를 하던 시절, 술을 진탕 퍼마시고 필름이 완전히 끊긴 채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의 그 공포는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불길한 예감에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켰을 때, 통화 목록 맨 위에 선명하게 박혀 있던 전 여친의 이름과 그 옆에 적힌 '통화 시간 15분'이라는 숫자를 마주했던 그 찰나의 순간. 그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쫙 흘러내렸다. 그건 남의 지질한 연애사를 편하게 관람하는 게 아니라, 내 판도라의 상자 속에 봉인해 두었던 흑역사를 강제로 소환당해 멱살을 잡힌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끝까지 그 15분 동안 무슨 말을 떠들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영원히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다. 너무 쪽팔리고 두려워서 전 여친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내가 어제 무슨 말 했어?"라고 물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 15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온갖 질척거리는 매달림과 낯부끄러운 후회의 헛소리를 쏟아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만으로 며칠 밤낮을 방바닥에서 이불킥을 해대며 괴로워했다. 영화 속 김래원의 그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 시절의 내가 겹쳐 보여 가슴이 아릿했다. 연애라는 게 항상 멋지고 로맨틱할 수만은 없고, 결국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저렇게 구질구질하고 지질한 바닥을 치는 법이다. 그 부끄러웠던 상처와 흑역사를 이제는 편한 친구와 함께 팝콘을 씹으며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극장 한 번으로 충분, OTT로 두 번 세 번 사서 고통받고 싶지 않다. 그 시절의 지질했던 내 모습과 이불킥의 기억을 굳이 집에서 다시 돌려보며 혼자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내 서툴렀던 지난 청춘의 흑역사를 향해 "그래, 너도 참 보통의 연애를 치열하게 겪어냈구나" 하고 등을 툭 쳐주며 시원하게 웃어넘긴, 그 극장에서의 유쾌했던 추억 하나로 이 영화를 소중하게 간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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