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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픽썬더 레스 그로스먼을 보며 헛웃음 친 15년 차 가공 기술자

by 풍성함 2026. 11. 6.

트로픽썬더 영화 공식 포스터

지독하게 웃긴데 묘하게 씁쓸한 뒷맛이 남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공장에서 15년 동안 쇳밥 먹으며 별의별 인간을 다 겪어본 탓인지, 화면 속 그 정신 나간 코미디가 마냥 남의 나라 헛소리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입고 도면 보던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입안이 바짝 말라붙더군요. 주말 저녁에 아이들 재워놓고 맥주 한 캔 따서 소파에 걸터앉았습니다. 낮에 CAM 프로그램 짜느라 종일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본 탓에 눈알이 뻑뻑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나 비우려고 틀었던 B급 코미디 영화 하나가, 엉뚱하게도 제 15년 직장 생활의 가장 더러웠던 기억을 정통으로 끄집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트로픽썬더 레스 그로스먼, 처음엔 톰 크루즈인 줄 몰랐다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까지 대머리에 가슴 털 수북한 그 뚱뚱한 아저씨가 톰 크루즈인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힙합 음악에 맞춰 엽기적인 춤을 춰대는데, 진짜 정신 나간 제작사 거물 한 명을 섭외해다 앉혀둔 줄 알았습니다. 말끝마다 쌍욕을 섞어가며 전화기를 집어던지는 꼴이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동남아 정글로 촬영 간 배우들이 진짜 무장 마약 조직한테 납치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터집니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 총알이 빗발치는데, 영화 제작사 대표인 레스 그로스먼은 태연하게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인질 몸값을 깎으려고 협상하기는커녕, 차라리 주연 배우가 정글에서 죽어버리면 거액의 생명보험금이 나오니 흥행 수익보다 훨씬 남는 장사라고 떠들어댑니다. 사람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판국에 손익계산서 숫자만 쳐다보며 웃는 꼴을 보는데 소름이 돋았습니다. 분명히 배꼽 잡으라고 만든 황당무계한 블랙코미디 장면인데도 도저히 마음 편하게 낄낄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모니터 너머 현장 사람이 죽든 다치든 알 바 아니고, 오직 자기 실적과 마진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그 악마 같은 태도가 제 현실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크린 속 제작사 대표의 춤사위는 지독하게 웃겼지만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런 파렴치한 인간 군상이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납기 전쟁터 한가운데에 버젓이 정장 차림으로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더 그랬습니다.

 

±0.003mm, 이틀 납기— 현장 15년이 불가능이라 했다

7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원청에서 내려온 도면 한 장에 작업자 전원이 숟가락을 내려놓았습니다. 직경 공차가 무려 플러스마이너스 1000분의 3밀리미터(±0.003mm)였습니다. 머리카락 굵기가 대략 0.05mm 안팎인데, 그걸 20토막 낸 미세한 오차 범위 안으로 쇠를 깎아내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금형 가공부터 열처리, 정밀 연마까지 거쳐야 하는 물량을 달랑 이틀 만에 맞춰 내놓으라는 정신 나간 납기였습니다. 현장 15년 차인 제 경력을 걸고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가공실 내부 온도가 1도만 오르내려도 쇠가 팽창해서 치수가 튀는 판국인데, 이틀 만에 지그 짜고 시제품 테스트까지 끝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원청 담당 차장은 라인 깔때기 운운하며 이번에 못 맞추면 거래처 등록을 취소하겠다고 거래처 사장 목을 비틀었습니다. 사장은 사색이 되어 제 손을 붙잡고 빌다시피 매달렸습니다. 결국 가공실 구석에 라꾸라꾸 접이식 침대를 펴놓고 생지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챔버 에어컨을 20도에 칼같이 묶어두고, 0.001mm 단위로 CAM 공구 보정값을 먹여가며 머시닝센터 앞을 지켰습니다. 알루미늄 블랭크를 물리고 황삭, 정삭을 거쳐 삼차원 측정기 테이블 위에 제품을 올릴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조금만 삐끗해도 제품은 그대로 고철통으로 직행했고, 깎아낸 시간은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이틀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마신 캔커피만 14캔이었습니다.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아 믹스커피와 편의점 김밥 반 토막으로 때웠습니다. 작업이 끝났을 때 체중계에 올라가 보니 이틀 새 2.8kg이 빠져 있었고, 손목형 혈압계 수치는 158에 102를 찍었습니다. 기계 도어에 머리를 기댄 채 서 있는데 머릿속 회로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며 세상이 핑 돌았습니다.

 

거봐 되잖아— 그 한마디에 태도를 180도 바꿨다

피똥을 싸가며 기적처럼 오차 범위를 맞춘 부품 서른 개를 성적서와 함께 납품 상자에 담았습니다. 핏발 선 눈으로 납기 약속 시간 30분 전에 원청 회의실 탁자 위에 물건을 올려놓았습니다. 사람 꼴이 말이 아닌 상태로 서 있는 제게 원청 차장이란 작자가 서류를 훑어보며 비죽 웃더니 툭 내뱉은 첫마디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거봐, 되잖아. 현장 기술자 놈들은 원래 엄살이 심해서 쥐어짜야 말을 듣는다니까."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날 처음으로 뼈저리게 알았습니다. 피로에 절어 마비되었던 뇌신경이 분노로 바짝 당겨졌습니다. 현장 사람이 며칠 밤을 새우며 제 수명을 깎아 바친 노력을, 고작 '게으른 놈들 쥐어짜기 성공한 관리자의 수완'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그 오만함에 온몸이 떨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가공 데이터 성적서가 든 서류철을 탁 소리 나게 덮어 제 품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리고 차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주 차갑고 정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공차와 일정은 현대 정밀가공 상식선에서 상시 양산이 절대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이번엔 사장님 체면 봐서 제 살 깎아 억지로 맞춰 드렸지만, 다음 발주부터는 대기업 중앙연구소에 가져가서 직접 깎아 오십시오. 저희는 이 조건으로 두 번 다시 발주 안 받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차장이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공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현장의 기술과 땀을 쥐어짜는 걸 당연한 권리로 아는 자들에게는, 단 1미크론의 배려도 베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조작 성적서, 라인 반나절 멈춤— 그 차장의 결말

그 난리를 치고 반년쯤 지났을 무렵, 건너 건너 업계 사람들을 통해 기가 막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차장은 제가 경고한 뒤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다른 임가공 하청업체들을 들쑤시고 다녔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단가 후려치기와 살인적인 납기를 들이밀며 똑같이 공장을 쥐어짰던 모양입니다. 결국 탈이 났습니다. 한 영세 가공업체가 그 억압과 납기 압박을 견디다 못해, 허용 공차를 벗어난 불량 부품의 삼차원 측정 성적서를 가짜로 조작해 납품해 버린 것입니다. 그 불량 부품이 그대로 조립 공정으로 흘러 들어갔고, 완성차 조립 라인이 무려 반나절 동안 올스톱되는 대형 참사가 터졌습니다. 분당 수천만 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완성차 메인 라인이 멈췄으니 본사가 뒤집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원인 규명 감사팀이 들이닥쳤고, 비상식적인 일정 강요와 하청업체 갑질, 조작 묵인 정황이 줄줄이 드러났습니다. 그 차장은 대기발령 상태로 감사를 받다가 중징계를 얻어맞고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했습니다. 업계 바닥이 워낙 좁다 보니 다른 협력사나 동종 라인으로의 재취업 길도 완전히 막혀버렸다는 후문이 돌았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속이 시원하다기보다는 헛웃음만 픽 나왔습니다. 현장의 한계를 정직하게 보고하는 기술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숫자로 사람을 짓누르던 자의 결말치고는 너무나 예상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 기계와 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사람 입술로 기계를 속이려 들었으니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현장 무시한 인간은 결국 지가 판 구덩이에 처박히더라. 그 사건 이후로 저는 도면을 마주할 때마다 제 손과 눈, 그리고 기계의 물리적 한계를 더 지독하게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관리자의 서류 놀음에 휘둘리지 않고, 가공 현장의 데이터와 오차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투명하게 일하는 것이 기술자의 유일한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내일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MCT 툴 세팅을 잡고 오차 100분의 1밀리미터를 다투는 현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 학원비와 아파트 대출 원리금이 찍힌 통장을 떠올리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쇠를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깎아내는 제 일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툴 체인저 돌아가는 소리 들으며 또 하루를 묵묵히 버텨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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