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검은 화면만 멍하니 비출 때까지 소파에서 한참을 못 일어났습니다. 불 꺼진 거실에서 무심코 엄지손가락으로 손톱 밑에 단단하게 굳은 검은 쇠때만 연신 문지르고 있었지요. 가공유 냄새와 쇳가루가 뒤엉킨 냄새는 샤워를 두 번이나 하고 나왔는데도 손가락 마디 사이에서 여전히 맴돌았습니다. 피곤해서 뻗어야 할 시간인데 눈만 멀뚱멀뚱 뜨고 벽면을 쳐다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시멘트 먼지 날리는 잿더미가 아니었습니다. 화면 속 주민들이 아파트 입구를 막아서고 눈에 핏발을 세우던 그 표정이었습니다. 모니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샘 가공 돌릴 때 거울 속에 비치던 제 피로에 찌든 얼굴과 너무 똑같아서 입안이 바짝 말라붙더군요.
황궁 아파트 첫 장면, 소파에서 못 일어난 까닭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고 황궁 아파트 딱 한 동만 살아남은 그 끔찍한 설정에서, 저는 정의로운 척하는 인물보다 바깥사람들을 매몰차게 쫓아내던 주민 대표와 사람들에게 먼저 시선이 닿았습니다. 밖은 영하 수십 도의 칼바람이 불고 먹을 것도 없는 생지옥인데, 내 집과 내 가족의 식량을 지키겠다고 눈을 부라리는 그 지독한 이기심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 처자식이 저 방 한구석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굶고 있었다면 저는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싶었습니다. 솔직하게 제 속을 까뒤집어 보면, 점잖게 나눔을 말하거나 양보를 입에 올릴 위인이 절대 못 됩니다. 남들보다 먼저 현장 구석에 굴러다니는 단단한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계단 입구에 서서 눈을 번뜩였을 게 뻔하지요. 내 새끼 입에 밥 한 숟가락 더 넣겠다고 남의 사정 따위는 가차 없이 짓밟았을 겁니다. 주민들의 악에 받친 눈빛 속에서 저 자신의 밑바닥을 그대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남에게 해코지 안 하고 성실하게 기계만 깎으며 살아온 줄 알았는데, 위기 앞에서는 누구보다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사살당한 기분이었지요. 명치끝이 얹힌 것처럼 답답하고 속이 메스꺼워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덕이니 상식이니 하는 말들은 배부르고 등 따스할 때나 지껄이는 사치라는 것을 그 사람들의 얼굴이 웅변하고 있더군요. 가장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우리는 평소에도 조금씩 그런 눈빛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의 실수를 모른 척 넘기거나 납기를 맞추려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일들이, 결국 저 시멘트 복도에서 바깥사람들을 밀어내던 손짓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손톱 밑 검푸른 선, 0.005mm와 15년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면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박여 있습니다. 정밀 부품을 가공할 때 머리카락 굵기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0.005mm 단위 공차를 맞추려면 아무리 좋은 측정기를 써도 마지막엔 결국 맨손 감각이 필요합니다. 장갑을 끼면 그 미세한 진동과 버(burr)의 결을 느낄 수 없어서, 차가운 쇠를 맨살로 더듬으며 가공면을 확인하곤 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알루미늄과 SUS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미세한 쇳가루와 냉각유 찌꺼기가 지문 골마다 파고듭니다. 퇴근해서 거친 솔에 빨랫비누를 묻혀 살갗에서 피가 맺힐 정도로 박박 문질러 닦아내도 손톱 밑에 낀 검푸른 선은 절대로 빠지지 않더군요. 15년 동안 쇳밥을 먹는 사이 제 피부 밑에 문신처럼 깊게 박혀버린 흔적인 셈입니다. 젊었을 때는 이 손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동네 식당에 밥 먹으러 가서 숟가락을 쥘 때면 옆자리 사람들의 시선이 제 손끝에 머무는 것 같아 슬그머니 주먹을 쥐고 허벅지 뒤로 손가락을 숨겼습니다. 기름때가 묻은 손을 보면 남들이 험한 일 하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까 봐 괜히 자격지심이 들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밤 소파에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손톱 밑 검푸른 선이야말로 제가 지난 세월 동안 처자식 굶기지 않고 지켜낸 가장 처절하고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남들 쉴 때 기름 냄새 맡아가며 버틴 시간들이 고스란히 굳어 있는 모양새를 보는데 손끝이 뻐근해졌습니다. 저 흔적이 없었다면 우리 집 네 식구가 발 뻗고 누울 방 한 칸도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2011년 스물일곱, 130만 원과 800원 캔커피
처음부터 모니터 앞에 앉아 CAD/CAM 마우스 잡고 프로그램 짠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1년 스물일곱 살에 처음 발을 들인 곳은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외곽의 허름한 임가공 공장이었습니다. 작업복을 입자마자 쥐여준 것은 비자루와 쇠봉이었습니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인 날카로운 칩들을 쓸어 담고 절단기 앞에 서서 하루 종일 시커먼 쇠봉을 치수에 맞춰 잘라내는 허드렛일부터 배웠지요. 여름이면 기계 밑바닥에 고여 썩은 절삭유 웅덩이에서 지독한 악취가 올라왔습니다. 그걸 바가지로 일일이 퍼내고 있으면 등줄기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무거운 바이스를 옮기다 발등을 찍혀 절뚝거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공구에 끼여 손톱이 시커멓게 죽었다가 빠져나가는 고통도 수없이 겪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쇳밥을 삼키며 버텼습니다. 그 시절 최저시급이 4,320원이었습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잔업을 밥 먹듯 하고 주말에도 불려 나가 기계를 돌렸는데, 통장에 찍힌 첫 달 월급이 고작 130만 원이었습니다. 공장 앞 편의점에 들어가 800원짜리 캔커피 하나를 사 들고 벤치에 앉아 그 통장을 빤히 내려다보았습니다. 온몸은 쑤셔대고 옷에서는 시큼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데, '이게 정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꼴인가' 싶어 눈앞이 막막하더군요. 피땀 흘려 번 첫 돈이라 편의점 캔커피 값 800원 말고는 단 10원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선배들 담배 피우러 갈 때 어깨너머로 모니터 화면을 훔쳐보며 좌표값 외우고, 밤마다 혼자 남아 CAM 툴패스 경로를 연구했습니다. 그 바닥을 구르고 굴러 0.005mm 공차를 맞추는 15년 차 엔지니어가 되는 동안, 스물일곱 살 철없던 청년은 어느덧 마흔둘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매달 100만 원 대출금, 그래도 내일 또 공장으로
스물일곱에 캔커피를 쥐고 막막해하던 놈이 15년을 바쳐 간신히 이 아파트 한 채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매달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원리금과 대출 이자가 통장에서 기계처럼 빠져나갑니다. 애들 학원비에 관리비까지 빠져나가고 나면 통장 잔고는 늘 바닥을 보이지요. 영화 속 무너진 세상에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집 한 채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를,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 저 시멘트 상자가 무너지면 내 가족의 생존 자체가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탈했습니다. 15년 동안 내 몸을 갈아 넣고, 손톱 밑에 지워지지 않는 쇠때를 묻혀가며 지켜온 이 번듯한 보금자리가 어쩌면 거대한 재난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하더군요. 이것 하나 지키겠다고 온갖 모욕을 견디고 영혼까지 갈아 넣었나 싶은 헛웃음이 씁쓸하게 샜습니다. 새벽 두 시가 넘어 살그머니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세상모르고 쌕쌕 숨을 몰아쉬는 녀석들의 발끝까지 이불을 조용히 끌어올려 덮어주었습니다. 이 조그만 숨소리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저는 내일 또 남들에게 매몰차고 독한 얼굴을 한 채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일 또 괴물 될 준비 하고 공장 가야 한다는 먹먹함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러옵니다. 가공 불량이 나면 안 된다는 압박감과 기계 소음이 가득한 그 전쟁터로, 몇 시간 뒤면 어김없이 알람 소리에 맞춰 무거운 몸을 일으켜 출근해야 합니다. 손톱 밑의 때를 다 지우지 못한 채 내일도 그렇게 버텨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