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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민덕희, 40대 가장의 통장 잔고와 식은땀

by 풍성함 2026. 10. 23.

시민덕희 영화 공식 포스터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캔맥주 겉면에 물방울만 맺혀서 미적지근해져 있었습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불 꺼진 거실 식탁에 멍하니 앉아 리모컨을 쥐었던 건 단순히 하루치 피로를 털어내려던 생각이었습니다. 종일 가공 프로그램 치수 맞추느라 모니터 잔상에 눈은 뻑뻑했고, 어깨는 돌덩이처럼 무거웠지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이나 때우다 잘 요량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던 영화였습니다. 방 안에서는 아내와 두 아이의 고른 숨소리만 간간이 문틈으로 흘러나왔습니다. 낮 동안 쇳가루 냄새와 냉각유 연기 속에서 버텨낸 대가로 얻은 유일한 혼자만의 정적이었지요.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려던 캔맥주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굳은 채 그대로 멈춰 섰습니다.

 

시민덕희 본 날 밤, 새벽 식탁과 미적지근한 맥주

 

가게에 불이 나고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 덕희에게 은행 대출 사기 전화가 걸려오는 순간부터 목구멍이 꽉 막혀왔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갈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화면에 잡히는데, 캔을 입가로 가져가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넘겼을 범죄 수사극의 도입부가 제게는 숨통을 죄어오는 공포영화처럼 다가왔지요. 멍때리자고 틀었는데 첫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덕희의 통장에서 피 같은 돈 삼천 몇백만 원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연출을 보며 제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습니다. 저 돈이 어떤 돈인지, 매달 통장에 찍히는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쪼개고 또 쪼개서 피눈물 나게 모은 돈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화면 속 숫자 몇 개에 불과하겠지만, 가장에게 저 돈은 자식들 밥줄이고 집안의 기둥 그 자체지요. 경찰서에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해도 번호표나 뽑고 기다리라는 식의 건조한 반응을 마주할 때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가공 공정 하나 꼬여서 치수 불량이 나면 온전히 제 책임으로 밤을 새워 깎아내야 하는 게 제 일상인데, 세상의 벽은 저토록 차갑고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기가 막혔습니다. 화면 속 덕희가 혼자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식탁 위 제 손톱 밑에 낀 기름때를 무의식중에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갈 때까지 캔맥주 겉면에 물방울만 맺혀 미적지근해져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넷플릭스 로고가 지나간 뒤, 까만 TV 화면에 멍하니 앉아있는 제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습니다. 초점 풀린 눈과 턱 밑까지 내려앉은 다크서클, 잔업 끝내고 돌아와 축 늘어진 중년 남자의 몰골이 화면 속 덕희의 처절했던 표정과 겹쳐 보여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굳은살 박인 손과 '나도 칭다오 갈 수 있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아이들 방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녀석의 배를 덮어주며, 쇠 깎는 일로 거칠어지고 굳은살 박인 손으로 자는 애 볼을 가만히 쓸어보다 묘하게 울컥했습니다. 쌔근쌔근 자는 얼굴 위로 방금 본 영화 속 덕희의 아이들이 겹쳐 지나갔기 때문이지요. 내가 만약 저 자리에서 저 돈을 통째로 털렸다면 과연 이 작은 생명들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솔직히 저 같았으면 칭다오는커녕 통장 잔고 0원 찍힌 걸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천장만 쳐다봤을 것 같습니다. 당장 다음 달 애들 학원비는 어쩌나, 관리비랑 대출 원리금 빠져나갈 날짜는 코앞인데 어디서 돈을 빌려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져서 며칠 밤낮을 헛손질만 했을 겁니다.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세탁공장 동료들 손을 잡고 말도 안 통하는 중국 땅까지 날아가 총격전을 벌이는 덕희의 용기는 영화니까 가능한 초인적인 행동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새끼들 밥숟가락 뺏기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보니까요. 매일 아침 졸린 눈 비비며 나가는 이유도, 납기 맞추느라 공장 바닥에서 쇳가루 뒤집어쓰며 12시간씩 서 있는 이유도 오직 이 녀석들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그 약속 하나 때문입니다. 그 근본을 건드리고 우리 식구 길바닥으로 내몬 놈이 있다면, 사람 속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멋진 영웅은 못 돼도 지구 끝까지 기어가서라도 멱살은 잡았겠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습니다. 번듯한 말주변도 없고 법도 잘 모르는 무지렁이 기술자라 해도, 내 가족 피 빨아먹은 놈 대가리채는 쥐어뜯어 놓아야 분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덕희가 중국 골목을 누비며 사기꾼 총책을 쫓던 그 눈빛은 정의감 따위가 아니라, 자식들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악바리 근성이었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코로나 그해 겨울, 두 달 반과 수명 십 년

 

덕희가 돈을 날리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절망하던 장면을 볼 때, 제 머릿속은 몇 년 전 혹독했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거래처 라인이 줄줄이 멈추고 공장 일감이 뚝 끊겼던 코로나 그해 겨울,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며 급여가 두 달 반 밀렸습니다. 마이너스 한도 끝까지 빨간 불이 들어오고, 카드는 한도 초과로 결제가 멈추던 그 계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춥고 지독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길,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차 시동을 끄고 핸들에 이마를 박은 채 마이너스 통장 한도 끝자락을 확인하던 순간 눈앞이 핑 돌았습니다. 당장 며칠 뒤 빠져나갈 대출 이자를 메울 길이 없어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요. 아무 일 없는 척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웃으면서 애들을 안아주는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쭉 흘렀습니다. 가장이라는 자리가 이토록 무겁고 잔인한 것인가 뼛속 깊이 사무치던 밤들이었습니다. 월말마다 휴대전화에 잔액 부족 문자 뜰 때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은행에서 독촉 전화가 올까 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지요. 내가 기술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닌데 왜 우리 가족이 이런 벼랑 끝으로 내몰려야 하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덕희가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느꼈을 막막함이 결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밀렸던 급여가 한꺼번에 통장에 들어오던 날, 공장 화장실 변기 뚜껑을 닫고 혼자 멍하니 앉아 헛웃음만 실실 흘렸습니다. 살았다, 이제 애들 밥은 굶기지 않겠구나 안도하면서도 다리가 풀려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두 달 반 동안 수명이 십 년은 깎여 나간 것 같았습니다. 그때 하얗게 세어버린 옆머리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통장 알림 뜰 때마다 그 서늘함이 불쑥불쑥 떠오릅니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뜨고, 작업복 지퍼를 올리며 공장 기계 앞으로 걸어 나갈 것입니다. 0.01밀리미터 공차와 씨름하며 기름 냄새 속에서 하루를 버텨내는 일, 그것만이 내 아이들과 아내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유일한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덕희가 털고 일어났듯, 저 역시 식탁의 미적지근한 맥주캔을 비우며 가장의 자리를 지키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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