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두 시 반, 쇳가루 날리는 공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름 묻은 작업복 소매로 얼굴을 감싸 쥐었습니다. 주말 심야에 불을 끄고 혼자 영화 도그맨을 보다가 불현듯 몇 해 전 그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정수리를 치고 올라왔습니다. 주인공 더글라스가 휠체어에 몸을 싣고 상처투성이 얼굴로 개들을 바라보던 눈빛을 보는데, 뜬금없이 기름때 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어제도 야간 잔업을 치르고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겨우 집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모니터 앞에서 CAM 툴패스 선을 하도 노려봐서인지 눈을 감아도 시뻘건 가공 궤적이 잔상처럼 망막에 어른거렸습니다. 씻지도 못하고 멍하니 소파에 걸터앉아 리모컨을 돌리다 튼 영화였습니다. 화면 속에서 개 우리에 갇혀 자란 한 남자가 세상 밖으로 기어 나와 살아남는 과정이, 제게는 남의 나라 기구한 인생사가 아니라 당장 오늘을 버텨낸 한 인간의 악착같은 호흡으로 다가왔습니다.
도그맨이 찌른 기억, 새벽 두 시 반 공장 바닥
그날 새벽 두 시 반의 공장 바닥은 정말이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납기일은 코앞이고 가공 시간은 턱없이 모자란 상태에서, 어떻게든 사이클 타임을 줄여보겠다고 이송 속도를 무리하게 올렸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스핀들이 돌아가는 굉음 사이로 찰나의 순간, 퍽 하는 파열음이 가공실 안을 울렸습니다. 30만 원짜리 수입 초경 앤드밀이 8,000RPM의 회전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1초 만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비상 정지 버튼을 누르고 방호문을 열었을 때 풍기던 그 매캐한 절삭유 타는 냄새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기계 안쪽 바닥에 흩뿌려진 초경 파편 하나를 무의식중에 장갑 벗은 손으로 집어 들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고속으로 회전하던 쇳덩이라 손바닥이 데일 듯 뜨거웠습니다. 그 뜨거운 파편이 손바닥 위에서 완전히 식어 싸늘해질 때까지, 저는 공장 바닥에 주저앉아 꼬박 10분을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소수점 두 자리 공차를 다투는 도면 앞에서 툴 하나 부러진 건 단순한 공구 파손이 아닙니다. 내 계산이 틀렸다는 자괴감, 오늘 밤 안에 이걸 끝내지 못하면 내일 아침 조립 라인이 전부 멈춘다는 무거운 압박감이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영화 도그맨에서 더글라스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개 우리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느꼈을 그 막막함이,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순간의 제 심정과 어딘가 닮아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부러진 칼날을 쥐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소매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벅벅 문질러 닦아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시간조차 저에게는 사치였습니다. 통장 잔고는 빠듯하고, 집에서는 자는 아이들과 아내가 저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것 말고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피드 40%, 납기 20분 전 턱걸이
새 앤드밀을 홀더에 물리고 공구 세팅을 다시 잡았습니다. 오버라이드 노브를 돌려 피드를 40%까지 사정없이 낮췄습니다. 공구가 또다시 부러지면 그걸로 끝장이라는 생각에,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이 들어갔습니다. 쿵쾅거리는 기계 진동을 온몸으로 받으며 새벽 네 시부터는 아예 기계 안전창 투명 유리에 이마를 딱 붙이고 버텼습니다. 절삭유가 유리창 안쪽에 비처럼 튀어 시야를 가려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칩이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가공 부하 바늘이 위험 구간으로 치솟지는 않는지 날을 세워 살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사나운 들개들의 이빨 사이에서 끝끝내 살아남을 길을 찾았듯, 저 역시 회전하는 앤드밀 날끝 하나에 제 온 신경을 전부 걸어두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창문 틈으로 희끄무레하게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마지막 황삭과 정삭 공정이 끝났습니다. 에어건으로 제품에 묻은 절삭유를 불어내고 3차원 측정실로 들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손을 덜덜 떨며 마이크로미터를 물려 치수를 쟀습니다. 요구 공차는 0.02mm 이내였는데, 측정기 디지털 창에 찍힌 숫자는 간신히 기준치 안쪽에 걸쳐 있었습니다. 납기 트럭이 공장 마당으로 들어오기 딱 20분 전에 이뤄낸 턱걸이 합격이었습니다.
기름밥 15년 짬밥, 사장 딱 한마디
아침 7시 반이 되자 사장이 슬리퍼를 끌고 공장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밤새 퀭해진 제 얼굴과 납품 상자에 담긴 가공품을 번갈아 보더니, 종이컵에 믹스커피 한 잔을 타서 제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기름밥 15년 짬밥 어디 안 간다." 툭 던진 그 사장의 딱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수고했다는 긴 칭찬도, 밤새 고생 많았다는 위로도 아니었습니다. 그 무뚝뚝한 한마디를 듣는 순간, 밤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 줄이 툭 하고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납품 기사는 물건을 싣고 서둘러 공장 문을 빠져나갔습니다. 덜덜거리며 멀어져 가는 그 낡은 1톤 포터 트럭의 찌그러진 뒷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는 자기를 지켜주던 개들이 있었지만, 저한테는 저 찌그러진 포터 트럭이랑 기름때 묻은 공작기계가 딱 그 짝이었구나 싶었습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쇳덩이들이지만, 결국 이 녀석들이 저를 먹여 살리고 제 가정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굳은살 박인 손으로 이불 덮어주며
주말에 잔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을 열면 집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기름 찌든 내를 풍기며 들어갈 수 없어 욕실에서 비누칠을 세 번씩 하고 나와, 살금살금 아이들 방 문을 엽니다. 곤히 잠든 두 녀석 곁으로 다가가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투박한 손으로 이불을 명치끝까지 조심스럽게 끌어올려 덮어주었습니다. 제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기름때가 배어 아무리 씻어도 거무스름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거친 손이 행여나 아이들 부드러운 살결을 긁을까 조심스레 닿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말로 다 표현 못 할 온기가 조용히 차오릅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소수점 단위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삭막한 기계 안쪽 같아도, 이 방 안의 숨소리만큼은 따뜻하고 평온하기를 바라는 게 가장의 마음일 겁니다. 더글라스는 절망 속에서도 끝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저 역시 수만 번 회전하는 칼날 앞에서도, 매달 닥쳐오는 생계의 무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쓰러지지 않았다, 아직 내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알람이 울리면 저는 또다시 구겨진 작업복을 주워 입고 차가운 시동을 걸 것입니다. 기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공장 바닥으로,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담담히 출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