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록색 피부라도 자기가 진짜 날고 싶으면 저렇게 높이 날 수 있는 거지?”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환한 불이 들어오는 순간, 품에 팝콘 통을 소중하게 꼭 끌어안은 아홉 살 딸아이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던진 이 질문을 들은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그저 주말을 맞아 아이 손을 잡고 화려한 뮤지컬 영화 한 편 편안하게 즐기고 오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그 순수하고 맑은 한마디는 일상의 피로와 관성에 젖어 굳어 있던 마흔둘 아빠의 가슴 한구석을 아주 묵직하게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존 추 감독이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명작을 완벽에 가까운 시네마틱 스케일로 스크린에 옮겨낸 영화 《위키드》는, 그렇게 상영관의 어둠을 뚫고 나와 우리 부녀의 마음에 잊히지 않을 찬란한 에메랄드빛 불꽃을 지펴주었습니다.
위키드 관람 후기, 폭풍우에 휩쓸린 듯한 탈진감
영화 《위키드》의 줄거리는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도 한눈에 단숨에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명쾌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품고 있습니다. 온몸이 초록색이라는 이유로 태어난 순간부터 평생 가족에게조차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의 차가운 편견과 조롱을 온몸으로 견뎌온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분)가 마법 학교인 시즈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곳에서 모든 이들의 선망과 인기를 한 몸에 받지만 늘 남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사랑스러운 룸메이트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를 만나게 됩니다. 겉모습도 가치관도 완전히 정반대였던 두 소녀는 사사건건 티격태격 부딪치면서도, 상처 입은 내면의 결핍을 서로 보듬으며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깊은 우정을 쌓아갑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았던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가 실은 말 못 하는 동물들의 언어를 빼앗고 통제하려는 추악한 거짓의 지배자였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면서, 둘의 운명은 거친 폭풍우처럼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다수가 박수 쳐주는 화려한 명예와 안락한 삶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침묵을 선택한 글린다와 달리, 엘파바는 온 세상이 자신을 사악한 마녀라 부르며 손가락질하더라도 진실과 약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홀로 거대한 세상에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세상의 모든 부조리한 시선과 위선, 그리고 인간을 짓누르는 거대한 중력의 법칙마저 찢어발기며 명곡 ‘디파잉 그래비티(Defying Gravity)’가 웅장하게 터져 나오는 순간, 나는 마치 거대한 토네이도에 온몸이 휩쓸려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간에 다녀온 듯한 벅찬 탈진감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시아 에리보의 폭발적인 성량과 압도적인 감정이 스크린을 찢을 듯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엘파바가 낡은 빗자루를 타고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박차고 나가 웅장한 밤하늘 높이 솟구쳐 오를 때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전율이 쫙 돋았습니다. 나를 옥죄던 세상의 무거운 잣대 따위는 시원하게 다 집어던지고 저렇게 당당하게 비상하고 싶다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라, 극장 좌석의 팔걸이를 부서져라 꽉 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9살 딸 눈동자에 에메랄드빛이 비치던 순간
그 경이로운 전율의 순간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옆자리를 슬쩍 돌아보았을 때, 내 눈에 들어온 아이의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뭉클함을 안겨주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상영 시간이 두 시간을 훌쩍 넘어가면 엉덩이를 들썩이거나 다리를 배배 꼬며 팝콘을 부스럭거리던 아홉 살 꼬맹이가, 두 눈동자에 스크린의 찬란한 에메랄드빛을 가득 담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아이의 조그만 손을 가만히 쥐어보았더니,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밸 정도로 힘을 꼭 쥐고 영화 속 세계로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 있었습니다.
영화가 완전히 끝나고 엔딩 크레딧의 자막이 은막 위로 다 올라갈 때까지도 넋을 잃고 화면을 응시하던 아이는, 품에 팝콘 통을 소중하게 껴안고 내게 조심스레 물어왔습니다. "아빠, 초록색 피부라도 자기가 진짜 날고 싶으면 저렇게 높이 날 수 있는 거지?"
올해 초등학교 2학년, 이제 막 세상의 규칙을 배워가는 아홉 살 아이는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만 친구들과 다르면 이상한 걸까?", "남들이 날 놀리지는 않을까"라며 슬그머니 주변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하던 참이었습니다. 조금씩 세상의 획일적인 잣대 앞에서 주눅 들고 작아져 가던 그 작은 아이의 마음에, 피부색이 남들과 완전히 달라도 온 힘을 다해 창공을 가르는 엘파바의 눈부신 용기가 그 어떤 백 마디 잔소리보다 깊숙하게 날아와 꽂혔던 것입니다.
마흔 아빠의 날개, '내 나이에 무슨 욕심'이라던 참이었다
사실 그 순간 아이의 질문 앞에서 내 가슴이 그토록 철렁 내려앉았던 이유는, 나 역시 마흔둘이라는 나이에 갇혀 '내 나이에 무슨 새로운 욕심을 부리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그저 남들 시키는 대로 모나지 않게 제자리나 지키며 버티는 게 정답이다'라며 내 안의 오랜 꿈과 날개를 조용히 접어두던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일터에서 기계 소음과 치수 공차에 시달리며, 현실의 무게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그저 하루하루 관성에 기대어 살아가던 내 비겁함을 아이의 맑은 눈망울 앞에서 그대로 들켜버린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아이의 작고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쥐어주며, 온 마음과 진심을 다해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남들이 피부가 초록색이라고 비웃든 뒤에서 손가락질하든 아무 상관없어. 네가 마음속으로 진짜 높이 날고 싶다면, 넌 언제든 저 하늘 끝까지 멋지게 날아오를 수 있는 거야."
그 말은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건네는 아빠의 따뜻한 응원이자, 삶의 무게 뒤로 주춤거리며 비겁하게 숨으려던 나 자신을 향해 똑바로 살라고 내지른 가장 뜨거운 채찍질이자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이후 내 일상의 공기는 완연히 달라졌습니다. 아이가 밤에 곤히 잠들고 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소파에 누워 멍하니 스마트폰이나 TV 화면을 넘기던 나태한 습관을 단칼에 끊어냈습니다. 곧장 책상 앞에 앉아 그동안 핑계 대며 미뤄두었던 공부의 책장을 넘기고, 나만의 새로운 도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딸아이를 대하는 말씨도 180도 바뀌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만 조용히 따라가라", "괜히 튀는 행동 하지 마라"는 무미건조하고 비겁한 훈계 대신, 아이가 엉뚱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더라도 "네가 가슴 뛰게 좋아하는 일이라면 끝까지 한번 해봐. 아빠가 뒤에서 단단한 벽처럼 든든하게 받쳐줄 테니까"라며 눈을 맞추고 환하게 웃어주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진정으로 자랑스럽고 멋진 아빠가 되려면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훈계할 것이 아니라, 거친 비바람과 편견의 중력을 뚫고 제 힘으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어른의 단단한 뒷모습을 삶으로 직접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태도에 묵직한 힘이 실렸습니다.
나부터 날아오르는 뒷모습을 보여줘야 하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내 발걸음과 태도에는 이전과 다른 단단한 힘이 붙었습니다. 오늘도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든 고요한 밤, 내 접어두었던 작은 날개를 활짝 펼치기 위해 주저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 불을 켭니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어제보다 한층 더 당당하고 단단해진 눈빛으로 사랑하는 딸아이의 작은 손을 따뜻하게 꽉 잡아줄 것입니다. 영화 《위키드》는 스크린의 화려한 마법을 넘어, 세상이 규정한 한계의 중력에 짓눌려 날개를 접고 살아가던 수많은 어른과 아이들에게 당신 안의 가장 찬란한 비상을 믿으라고 등을 힘껏 떠밀어주는 눈물겨운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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