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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잔업 끝 거실에서 마주한 가장의 공포

by 풍성함 2026. 10. 6.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영화 공식 포스터

슬리퍼 끌 생각도 못 한 채 차가운 마루 바닥 위에 발바닥을 붙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거실 시계 초침은 이미 새벽 2시를 훌쩍 넘겨 돌아가고 있더군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식탁 위에는 아내가 랩으로 덮어둔 식은 국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숟가락을 들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겉옷만 대충 벗어 던진 채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 컵라면 하나를 겨우 비워냈습니다. 몸은 완전히 파김치인데 머릿속은 이상하게 팽팽했습니다. 기름 냄새와 절삭유 냄새가 코끝에 남아 맴도는데도 쉽게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더군요. 잠을 자야 내일 또 눈을 뜨고 출근할 텐데,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도무지 누울 자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잠이 도통 안 오더군요. 멍한 눈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무심코 TV 전원을 켰습니다. 그렇게 혼자 불 꺼진 거실에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인피니티 워, 새벽 2시 잔업 끝에 혼자 튼 날

새벽 2시 10분, 야간 잔업을 끝내고 컵라면 국물을 들이켠 뒤에 화면을 띄웠습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 반이 넘도록 공장 바닥에 박혀 있었습니다. 꼬박 15시간 반 동안 쇠를 깎고 치수를 재는 일의 연속이었지요. 잔업만 6시간을 넘기면서 혼자 머시닝센터(MCT) 세 대를 동시에 돌려댔습니다.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파고드는 빡빡한 공차를 맞추느라 온종일 버니어캘리퍼스와 마이크로미터를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엔드밀이 부러지거나 귀한 가공물이 불량으로 튀어나갑니다. 쇠 깎이는 비명 소리와 고압으로 뿜어지는 절삭유 안개 속에서 온종일 신경줄을 바짝 조이고 살았습니다. 가공 원점을 잡고 프로그램을 수정하며 납기일을 맞추느라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습니다. 어깨는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고 허리는 끊어질 듯 쑤셔왔습니다. 보통 이 정도 몸 상태면 씻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곯아떨어지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묘하게 뇌세포 한구석이 찌릿하게 깨어 있었습니다. 모니터 속에서 쉼 없이 돌아가던 CAM 가공 경로와 좌표 숫자들이 눈을 감아도 잔상으로 떠돌았습니다. 피로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신경이 곤두서는 그 지독한 감각 때문에 잠자리에 들 엄두가 안 났던 겁니다. 머리나 식힐 겸 화려한 히어로 액션이나 멍하니 틀어두고 눈을 붙일 생각이었습니다.

 

두 시간 반, 1초도 못 졸고 리모컨 손에 땀 배던 밤

그런데 1초도 졸지 못하고 두 시간 반 동안 뜬눈으로 화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에서는 어느샌가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오더군요.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제가 알던 시원시원한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힘깨나 쓴다는 우주의 영웅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고 부딪히는데, 그 거대한 벽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한 시스템 앞에 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 우주의 절반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묵직한 쇠뭉치로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숨을 들이쉬지 못했습니다. 계산착오나 오차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단두대가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장에서 프로그램 좌표 하나 잘못 입력해서 고가의 장비와 공구가 한순간에 박살 나며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참상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의 섬뜩함이 그대로 겹쳐 보였습니다. 그 어떤 사정도 봐주지 않는 잔인한 공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은 채 토니 스타크를 붙잡고 쓰러지던 목소리가 귓전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영웅의 마지막 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냥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의 문턱으로 끌려가는 어린아이가 제발 살려달라고 토해내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것이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매달리는 그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잠들어 있는 제 두 아이들의 숨소리와 겹쳐지면서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불 꺼진 거실, 슬리퍼도 못 신고 차가운 마루에 섰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TV 전원이 꺼진 뒤에도 5분 동안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발끝에 슬리퍼를 꿸 생각조차 못 한 채, 차가운 마루 바닥의 한기가 굳은살 박인 발바닥을 타고 그대로 올라왔습니다. 정적만이 감도는 집 안에서 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침만 삼키며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습니다. 불 꺼진 어둠 속에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내려앉았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쇠 깎는 기름밥을 먹으며 여기까지 버텨왔습니다. 바닥에서 칩을 쓸어 담던 풋내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도면을 보고 공정을 설계하는 위치까지 올라왔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늘 불안합니다. 단 한 번의 손가락 튕김, 핑거스냅 같은 무자비한 경제 위기나 산업의 파도가 덮쳐오면 내가 악착같이 지켜온 이 자리 하나 온전히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나 혼자 고꾸라지는 건 무섭지 않지만, 내 어깨에 매달려 있는 처자식이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상상은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베란다 창문을 살짝 열고 나가 새벽 찬 바람을 얼굴에 맞았습니다. 정수기에서 차가운 물 한 컵을 가득 받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내 새끼들한테만큼은 저런 막막한 공포를 겪게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유리컵을 싱크대에 내려놓는 손끝에 서늘한 냉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굳게 입술을 깨물며 마른세수를 한 번 길게 했습니다. 몇 시간 뒤면 또다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공장으로 나가 기름 냄새를 맡아야 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납기일에 쫓기며 소수점과의 싸움을 이어가겠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겁니다. 아이들의 평온한 아침을 지켜내는 것이 지금의 내가 짊어져야 할 유일한 몫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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