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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습니다, 잘라내야 산다는 잔인한 계산 앞에서

by 풍성함 2026. 11. 2.

밤이 되었습니다 영화 공식 포스터

“아, 이 공장에서도 마피아 투표가 시작됐구나.” 영화 <밤이 되었습니다>를 보고 난 다음 날 아침, 출근 도장을 찍자마자 사장이 제 공구함 쪽으로 다가왔을 때 딱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고립된 수련원에 갇힌 고등학생들이 휴대폰 투표로 매일 밤 서로를 지목해 죽여 나가는 화면을 새벽까지 보다가 출근한 참이었습니다. 붉은 피가 튀는 잔인한 장면보다 제 신경을 긁었던 건, 살기 위해 누군가를 반드시 희생양으로 지목해야만 하는 그 지독한 규칙 자체였습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컴프레셔 돌아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유난히 날카롭게 울렸습니다. 사장의 얼굴엔 며칠째 잠을 못 잔 기색이 역력했고, 손에 들린 결재판 모서리는 하얗게 닳아 있었습니다. 그 서류철 안에는 지난달 임가공 단가 인하 통보서와 함께 전 직원 인건비 명세서가 들어 있었을 겁니다. 영화 속 아이들이 밤마다 벌벌 떨며 누구를 투표창에 올릴지 눈치를 살피던 모습이, 휑한 공장 바닥 위로 겹쳐 보였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베란다 담배 한 대

어젯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물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건너편 상가 불빛들은 하나둘 꺼져가는데, 머릿속에서는 낮에 확인했던 가공 스케줄표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5축 머시닝센터와 복합 CNC 선반 다섯 대 중 두 대는 이미 며칠째 전원이 꺼진 채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거래처에서 들어오던 자동차 알루미늄 부품 물량이 지난달 대비 30% 넘게 뚝 떨어져 나간 탓이었습니다. 기계가 서면 공장은 죽은 공간이 됩니다. 주축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절삭유를 뿜어내는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서늘한 적막만 감돌 때, 기술자는 가장 밑바닥의 공포를 느낍니다. 매달 돌아오는 설비 할부금과 공장 임대료, 그리고 매일 쏟아져 나오는 외주 가공비 명세서는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베란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니 20대 때 기름밥 먹기 시작하며 패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푸석하게 찌든 40대 가장만 서 있었습니다. 방 안에서는 초등학교 다니는 첫째와 둘째 녀석이 이불을 걷어찬 채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다음 주에 결제해야 할 둘째 치과 진료비 영수증과 첫째 학원비 고지서가 얌전히 놓여 있었습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물가는 숨이 찰 정도로 치솟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장의 물량이 30% 빠졌다는 건, 단순히 일거리가 줄었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밥줄을 끊어내야 할 차례가 다가왔다는 신호였습니다. 기계 두 대의 불이 꺼져 있다는 건 사람 두 명의 인건비가 허공으로 증발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 살기 위해 남의 이름을 누르던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아, 이 공장에서도 마피아 투표가 시작됐구나. 손가락 하나로 누군가를 찍어내야 하는 잔인한 계절이 기어이 우리 작업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마피아 게임, 공장판 — 사람 치는 건 제일 마지막에

사장이 제게 다가와 커피 한 캔을 쥐여주며 꺼낸 첫마디는 예상대로였습니다. 이번 달 적자가 심각해서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분기 동안 현장에서 발생한 각종 손실 명세서를 꺼내놓았습니다. 석 달 동안 자재 파손과 불량으로 날아간 손실만 대략 800만 원에서 1000만 원 선이었습니다. 거기에 새로 들어온 막내가 주축을 바이스에 박아버리는 바람에 스핀들 수리비로만 180만 원이 나갔고, 가공 지연으로 인한 납기 페널티 200만 원까지 청구된 상태였습니다. 숫자는 잔인했습니다. 장부 위에 찍힌 붉은색 마이너스 금액들은 당장이라도 현장 기사들의 목을 죌 듯이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습니다. 사장은 말끝을 흐리며 2호기 오퍼레이터로 일하는 막내 녀석의 이름을 은근슬쩍 올렸습니다. 기술도 아직 덜 붙었고 사고만 치는데,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뜻이었습니다. 사장의 눈빛 속에는 영화 <밤이 되었습니다>에서 다수가 모여 무능하거나 실수 많은 한 명을 마피아로 몰아가던 그 비겁한 합리화가 그대로 묻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목구멍으로는 마른침이 아니라 피가 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자재 불량과 스핀들 파손의 책임에서 메인 프로그램을 짜고 도면을 내려준 제가 과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신입이 공구 길이 보정값을 잘못 넣었을 때 더블 체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제 안일함도 분명 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지면 언제나 가장 힘없고 단가가 낮은 바닥부터 잘려 나가는 게 이 바닥의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사장의 말을 자르고 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 치는 건 제일 마지막에 합시다. 지금 애 하나 자른다고 꺼진 기계 불이 다시 켜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 다음 주부터 들어올 SUS316 난삭재 가공 물량은 어차피 손 빠른 인원이 붙어야 쳐낼 수 있다고 버텼습니다. 제가 주말 특근 수당을 반납하고 CAM 툴패스를 다시 최적화해서 가공 시간 15% 줄여 손실을 메워볼 테니, 일단 지켜보자고 사장을 밀어붙였습니다. 그건 신입을 향한 동정이라기보다, 언젠가 저 역시 저런 논리로 투표함에 이름이 오를 수 있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에 가까운 저항이었습니다.

 

너덜너덜한 수첩, 새벽 4시

사장을 돌려보내고 2호기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막내 녀석은 이미 사장과 제가 나눈 대화의 공기를 눈치챘는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손을 덜덜 떨며 마이크로미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녀석의 공구함 위로 기름때가 잔뜩 묻어 가장자리가 다 뜯겨 나간 포켓 수첩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손때가 묻은 그 수첩을 보는 순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던 모진 소리들이 컥 막혀버렸습니다. 수첩을 넘겨보니 제가 지나가듯 던졌던 공구 진입 피드값, 황삭과 정삭 회전수 차이, 알루미늄 가공 시 칩 배출 요령 같은 것들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기름 냄새 진동하던 공장에서 선반 베드 닦아가며 기술 배우던 제 막내 시절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때의 저 역시 기계를 부숴 먹고 공장장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어가며 매일 밤 자괴감에 화장실 구석에서 몰래 울곤 했습니다. 수첩을 탁 덮어 공구함에 던져놓고 녀석의 뒤통수를 툭 쳤습니다. 울 시간에 렌치 들고 와서 베드 칩이나 긁어내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스핀들 얼라인먼트가 틀어졌으니 기계를 뜯어서 새로 잡아야 했습니다. 외주 수리 기사를 부르면 출장비만 수십만 원이 깨지니, 우리 손으로 직접 뜯어서 센터를 다시 맞춰야만 사장의 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도망치듯 눈물을 훔치던 녀석이 잽싸게 렌치 세트와 인디케이터를 챙겨 들고 기계 안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야근 셔터가 내려간 적막한 공장에서 새벽 4시까지 둘이 붙어 기계를 뜯고 영점을 잡았습니다. 주축 헤드를 풀고 마그네틱 베이스에 다이얼 인디케이터를 물려가며 바늘의 미세한 흔들림을 잡았습니다. 0.01mm 틀어진 걸 잡으려고 동판을 두드리고 볼트를 조였다 풀기를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겨울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작업복 안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마피아 게임처럼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지만, 망가진 기계와 사람을 붙잡고 새벽을 버텨내는 건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5년째 옆 기계, ±0.005mm

그렇게 새벽 4시까지 씨름하며 주축을 바로잡았던 그 녀석이 지금 제 옆 기계에서 일한 지 벌써 5년째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도면 한 장 던져주면 공구 세팅부터 원점 설정까지 군더더기 없이 혼자서 척척 해냅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항공기용 알루미늄 브래킷 가공도 공차 ±0.005mm 안으로 딱딱 뽑아냅니다. 소수점 셋째 자리 싸움인 정밀 가공에서 이 정도 공차를 흔들림 없이 유지한다는 건, 그만큼 기계의 숨소리와 떨림을 몸으로 완벽히 익혔다는 증거입니다. 영화 <밤이 되었습니다>의 잔혹함은 누구 하나를 제거해도 그 자리에 또 다른 죽음의 투표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가 올 때마다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연명하는 회사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부품 취급하며 쉽게 갈아치우는 곳에서는 누구도 기계에 진심을 담지 않고, 소수점 단위의 정밀도를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우지도 않습니다. 그 너덜너덜한 수첩을 찢어버리지 않고 새벽 4시까지 함께 기름을 닦았던 그 밤이 결국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살린 셈이었습니다. 오늘도 5축 가공기는 쉴 새 없이 돌았고, 납기를 하루 앞둔 까다로운 임펠러 가공 툴패스를 맞추느라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사무실 모니터 화면에는 여전히 복잡한 3D 가공 경로가 푸른색 선을 그리며 얽혀 있었습니다. 눈이 뻑뻑해 안약을 넣고 작업장으로 내려오는데, 녀석이 제 공구대 옆으로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툭 내려놓았습니다. 녀석은 늘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하는 제일 싼 캔커피만 사 오는데, 그 버릇은 5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습니다. 캔커피를 내려놓으며 녀석이 말했습니다.

 

“반장님은 CAM만 짜고 일찍 들어가세요.” 치수 검사 성적서에 찍힌 완벽한 수치들을 확인하며 기계 문을 닫는 녀석의 듬직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 살벌했던 공장판 투표에서 이 녀석을 쫓아냈으면 오늘 이 말은 결코 듣지 못했을 겁니다. 내일도 아침 7시 40분까지 출근해 기계를 돌려야 하고 통장 잔고의 압박은 여전하겠지만, 믿고 기계를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동료가 옆자리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현장으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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