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야간 잔업 끝에 마주한 내 아이의 얼굴

by 풍성함 2026. 10. 13.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영화 공식 포스터

집구석 분위기마저 공장 야간 연장근무 라인처럼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밤 열 시가 훌쩍 넘어 도어록 '삐빅' 소리에 행여 애들 깰까 봐 조심조심 문을 열었는데, 거실에는 인기척 하나 없이 적막한 공기만 가득 차 있더군요. 현관 센서등이 꺼지기도 전에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스탠드 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큰애 녀석이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을 껌벅이며 문제집에 코를 박고 있었습니다. 피곤하면 침대에 들어가 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습니다. 공장에서 열세 시간 동안 쇳덩이를 깎고 치수 맞추느라 녹초가 된 몸으로 귀가했는데, 집안 꼴을 보니 피로가 두 배로 몰려왔습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대충 물만 끼얹은 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낮 동안 머릿속을 짓누르던 납기 일정과 통장 잔고, 다음 달이면 또 빠져나갈 아이들 학원비 명세서가 꼬리를 물고 떠오르더군요. 김치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마시다 만 페트병 막걸리를 꺼내 잔도 없이 입을 댔습니다. 멍한 눈으로 리모컨을 쥐고 OTT 화면을 넘기다가 거짓말처럼 영화 제목 하나에 시선이 딱 걸렸습니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고단한 하루 끝에 이런 제목을 마주하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픽 터져 나왔고, 홀린 사람처럼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야간 잔업 후 귀가, 공장 야간 라인 같던 집 풍경

낮 동안 가공실에서 씨름했던 알루미늄 블록의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맴돌고 있었습니다. 머시닝 센터 안에서 회전하는 엔드밀 날 하나가 부러지면 몇백만 원짜리 소재를 통째로 폐기해야 하기에, 온종일 0.01밀리미터 공차와 싸우며 신경을 곤두세웠지요. 그렇게 하루를 버텨내고 돌아온 내 집에서조차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참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큰아이는 내일 학원 레벨 테스트가 있다며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연필을 놓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둘째 숙제를 봐주다가 방전되어 안방에 곯아떨어져 있었지요. 매달 나가는 주택담보대출 이자에 두 녀석 학원비만 합쳐도 백오십만 원이 훌쩍 넘어갑니다. 내 손목과 허리를 갈아 넣어 야간 잔업까지 뛰는 이유가 결국 이 녀석들 남부럽지 않게 가르치려는 목적 하나뿐인데, 정작 아이 얼굴엔 핏기 하나 없더군요. 우리가 지금 무얼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계 소음이 가득한 공장 바닥이나, 문제집 넘기는 소리만 사각거리는 이 아파트 거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다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궤도에서 튕겨 나간다는 공포에 질려, 서로에게 쉴 틈 없는 작업 지시서만 들이밀고 있던 셈입니다. 쌉싸름하게 식어버린 막걸리를 한 모금 삼키며 화면을 응시했습니다. 화면 속에는 국영수는 기본이고 태권도에 코딩, 심지어 페르시아어 학원까지 다니는 초등학생 동춘이가 등장했습니다. 어른들의 욕심과 불안으로 빽빽하게 짜인 시간표를 아무런 표정 없이 묵묵히 소화해 내는 아이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더군요. 저 아이의 하루가 방금 전 방문 너머로 보았던 내 자식의 일상과 너무도 똑같아서였습니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목구멍으로 안 넘어간 이유

영상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손에 쥐고 있던 막걸리가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화면 속 동춘이의 멍하고 지친 무표정은, 매일 아침 통근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서 있는 제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버텨내는 표정을, 아직 세상도 다 모르는 어린것이 그대로 짓고 있었던 셈이지요. 가만히 돌이켜보니 저 역시 부모라는 이름표를 달고 아이들을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부품 하나하나 규격에 맞춰 찍어내듯,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빈틈없는 동선으로 아이를 굴려대고 있었습니다. 치수가 조금만 빗나가면 불량품이 된다는 내 직업병을 자식 교육에까지 그대로 들이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사회라는 정밀 기계에서 튕겨 나가 낙오자가 될 거라는 내 불안감을 아이의 어깨 위에 고스란히 얹어두었던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막걸리 발효통 속 기포가 '톡, 톡' 터지며 모스 부호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아이의 속마음에 귀를 기울이듯 터져 나오는 그 작은 탄산 소리가 제 귓가를 세게 때렸습니다. 마치 그 기포들이 제게 '당신 지금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고 따져 묻는 것만 같아 순간 덜컥 굳어버리더군요.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 아이들을 위한 든든한 보호막이라고 자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내 공포를 감추기 위해 아이들의 숨통을 쥐어짜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텁텁한 막걸리 맛 뒤로 쓴맛이 길게 남았습니다. 화면 속 동춘이가 막걸리가 알려주는 엉뚱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차올라 컵을 든 손을 바닥으로 내렸습니다.

 

새벽 3시 아이들 방, 지우개 가루와 메모 한 줄

엔딩 크레딧의 자막이 검은 화면 위로 다 올라갈 때까지 거실 불을 켜지 못했습니다. 푹 꺼진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한참 동안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귓가에는 여전히 톡톡거리던 발효 소리가 맴돌았고, 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리더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큰아이 방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엎드려 자려던 녀석을 아내가 간신히 침대에 눕혀놓았는지, 녀석은 책가방도 닫지 못한 채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 하얗게 흩어져 있는 지우개 가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모았습니다. 정답 하나 맞히겠다고 조그만 손으로 벅벅 문질러댔을 그 흔적을 만지작거리는데,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지더군요. 내가 만들어준 울타리가 이 아이들에게는 숨 쉴 틈조차 없는 감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이 스쳤습니다. 세상이 험난하다고 해서, 내가 매일 공장에서 치수와 납기에 쫓기며 산다고 해서, 이 작은 아이들까지 벌써부터 규격에 맞춰 깎아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정밀 부품이야 도면대로 딱딱 나와야 제값을 받는다지만, 내 자식의 인생은 오차 범위 없이 깎아내야 할 알루미늄 덩어리가 아니니까요. 책상 위에 놓인 노란색 포스트잇을 집어 들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내일 학원 숙제 잊지 말고 챙겨가라'는 잔소리를 적어 붙였을 자리였습니다. 연필을 쥐고 잠시 망설이다가, 포스트잇 잔소리 대신 '아이스크림 먹고 동네 한 바퀴 뛰자' 메모를 적어 스탠드 기둥에 꾹 눌러 붙였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불과 네 시간 반 뒤인 아침 일곱 시 반이면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시끄러운 공장 기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어지럽게 꼬여 있던 머릿속과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맑아졌습니다. 내일 퇴근길엔 잔업 수당 대신 아이들과 나눠 먹을 막대 아이스크림 몇 개를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