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상영관에 불이 켜졌는데, 우리 둘 다 팝콘 통에 손도 안 댄 채 넋이 나가서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2008년 그 무더웠던 여름날, 스물여섯 살짜리 현장 막내 둘이서 주말 특근 끝나고 찾았던 극장이었습니다. 기름때 찌든 작업복만 겨우 티셔츠로 갈아입고, 영화 한 편 시원하게 때린 뒤 국밥이나 한 그릇 말아 먹자며 들어갔던 길이었습니다. 막상 스크린이 꺼지고 나니 엉덩이를 뗄 수가 없었습니다. 쥐고 있던 콜라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만 바지 무릎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동기는 멍한 눈으로 빈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었고, 저 역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굳어 있었습니다. 오락 영화 한 편 보고 땀이나 식히려던 계획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머릿속에 남은 건 화려한 망토나 최첨단 장비가 아니었습니다. 화면 너머로 목덜미를 짓누르던 그 서늘한 기운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모든 비난을 짊어지고 경찰견에 쫓겨 도망치던 배트맨의 뒷모습이 시신경에 그대로 박혀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습니다.
다크나이트 첫날, 국밥집 숟가락만 담가놓고
극장 앞 24시간 순대국밥집에 들어가 뚝배기를 앞에 두고도 한참 동안 숟가락만 담가놓고 있었습니다. 펄펄 끓던 국물이 식어 기름막이 하얗게 굳어갈 때까지 둘 다 소주잔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뚝배기에서 올라오던 구수한 냄새도 코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동기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더니 툭 내뱉었습니다. 저건 히어로 만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사람 목을 조르는 현실 그 자체 아니냐고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고담시라는 가상의 도시를 핑계 삼아 스크린에 올려둔 건, 힘없는 개인이 감당하기엔 턱없이 버거운 삶의 밑바닥이었습니다. 조커라는 악당이 판을 깔아두고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과정은 지독할 정도로 집요했습니다. 선량한 검사였던 하비 덴트가 한순간에 망가지고, 평범한 시민들이 탄 배 두 척이 서로의 폭파 스위치를 쥐고 흔들리는 모습은 끔찍했습니다. 선과 악의 대결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바닥까지 드러내는 추악함과 나약함이었습니다. 스물여섯의 제 눈에도 그 상황은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현장 바닥에서 절삭유 냄새를 들이마시며 칩이 튀어 손등을 데이는 게 일상이던 시기였습니다. 위에서는 납기 맞추라고 쪼아대고, 공차는 100분의 1밀리미터도 빗나가면 불량이라며 욕을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세상이 원래 이렇게 숨 쉴 틈 없이 빡빡하고 잔인한 곳인가 싶어 막막하기만 했던 때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그 밤의 공기는 유독 무겁고 텁텁했습니다. 영웅이라 불리는 자가 승리하는 통쾌함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파탄 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가 홀로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는 결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게 스물여섯의 어린 기술자에게는 너무 묵직한 돌덩이로 가슴을 내리누르는 기분이었습니다.
공장 사고, 갓 서른 가장이 시말서 쓴 날
그 국밥집 기억을 안고 공장 생활을 이어가던 중, 기계 소리 요란하던 제 2공장에서 대형 사고가 한 번 터졌습니다. 고가의 머시닝센터에서 황삭 가공을 하던 중 엔드밀이 부러지면서 스핀들이 크게 먹통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수리비만 수천만 원이 깨질 판이었고, 그 라인 전체가 멈추면 원청 납기를 맞추지 못해 위약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원인은 명백했습니다. 윗선 관리자가 설계 변경된 최신 도면을 제때 현장에 넘겨주지 않았던 탓이었습니다. 전날 밤샘 작업을 지시하면서 옛날 데이터를 그대로 밀어 넣으라고 등을 떠민 건 사무실 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복잡한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납기 지연에 대한 책임과 깨진 기계값을 물어낼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나선 사람이 갓 서른이 된 제 바로 위 주임 선배였습니다. 집에 갓 돌 지난 핏덩이 딸린 젊은 가장이었습니다. 늘 분유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작업복을 입고 다니며, 야근 수당 몇 푼 더 챙기려고 주말마다 기계 앞에 붙어살던 형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공장장실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사무실 문틈으로 들려오던 고성과 욕설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윗선 관리자들은 뻔뻔하게 발을 뺐고, 선배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시말서를 썼습니다. 자기가 공구 마모 상태를 제대로 체크하지 못하고 가공 조건을 무리하게 올렸다는 거짓 내용이었습니다. 공장의 전체 라인을 살리고 윗선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혼자 모든 비난과 책임을 뒤집어쓴 셈이었습니다. 시말서를 쓰고 터덜터덜 현장으로 걸어 나오던 선배의 굽은 등을 보는데, 불현듯 극장에서 봤던 배트맨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하비 덴트의 추악한 살인을 감추고 고담시의 희망을 지키기 위해, 본인이 살인마라는 누명을 쓰고 어둠 속으로 도망치던 그 외로운 뒷모습 말입니다. 세상이 멀쩡하게 굴러가는 건 무슨 거창한 정의감이나 시스템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조직이 깨지지 않게, 돌아가는 판이 무너지지 않게 누군가가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을 뒤집어쓰고 침묵을 삼켜줬기 때문이었습니다. 억울하다고 소리 지르고 진실을 밝히는 순간 공장 전체가 풍비박산 날 것을 알았기에, 선배는 그냥 자기가 다 안고 가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애 분윳값 석 달 치는 더 벌고 나가니까 됐다"
그날 밤 야근을 마치고 공장 뒤편 자판기 옆에서 선배와 캔커피를 하나씩 뽑아 마셨습니다. 손을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던 선배에게 제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왜 형이 다 뒤집어쓰냐고, 도면 늦게 준 건 부장인데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선배는 힘없이 피식 웃더니 캔커피를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야, 여기서 내가 난리 치고 부장 멱살 잡으면 기계 고쳐지고 납기 맞춰지냐? 나만 바로 잘리고 끝나. 시말서 쓰고 감봉 석 달 맞으면, 어쨌든 애 분윳값 석 달 치는 더 벌고 나가니까 됐다." 그 한마디가 가슴을 퍽 치고 들어왔습니다. 거창한 희생정신이나 동료애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벼랑 끝에 서서 내 새끼 입에 들어갈 밥줄을 지켜내기 위한, 갓 서른 된 가장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억울함에 치를 떨 시간조차 그 선배에게는 사치였습니다. 당장 다음 달 통장에 찍힐 기저귀값과 월세가 그 자존심보다 훨씬 더 무거웠던 겁니다.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억만장자였고 지킬 도시가 있어서 악역을 자처했지만, 우리네 공장 바닥의 가장들은 지켜야 할 처자식이 있어서 기꺼이 바보가 되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회사가 잘못 짠 판 위에서 피를 흘리는 건 언제나 제일 밑바닥에서 기름 묻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결국 감봉 기간이 끝나갈 무렵 알아서 짐을 쌌습니다. 떠나는 날까지도 윗선에 대고 삿대질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현장 막내로 바닥을 기던 저도 이제는 마흔을 훌쩍 넘겨, 사무실에서 CAD/CAM 가공 프로그램을 짜고 공정을 잡는 고참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두 아이의 아비가 되었고, 매달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대출 이자와 학원비 고지서를 멍하니 들여다보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어깨에 얹힌 짐이 무거워질수록, 그 옛날 시말서를 쥐고 공장 마당을 서성이던 선배의 뒷모습이 시시때때로 제 목덜미를 서늘하게 잡아챕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일투성이고, 내가 하지도 않은 도면 오차나 공정 딜레이에 대해 변명조차 삼켜야 하는 날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수없이 삼키는 말들이 있습니다. 집에 있는 내 새끼 굶기지 않겠다는 가장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는 걸 이제야 뼈저리게 알게 됐으니까요.
자정이 넘은 시각, 내일 아침 납품해야 할 부품 가공 경로를 모니터로 한 번 더 검토하고 컴퓨터를 끕니다. 곤히 잠든 두 아이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내일도 기계 소리 요란한 공장으로 묵묵히 출근할 채비를 마칩니다.